이상길 논설실장·선임기자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청명한 하늘, 내리쬐는 햇살이 눈부신 이 계절. 6월10일이 머지않았다.

 
6월10일은 우리 현대사에서 국민이 역사의 주체임을 보여준 큰 사건들이 있었던 날이다. 하나는 5.18 광주 민중항쟁을 짓밟은 전두환 군부독재로부터 ‘6·29 항복 선언’과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냈던 87년 ‘6·10 민주항쟁.’ 또 하나는 2008년 이명박 정권의 굴욕적인 미국산 쇠고기 협상에 반대하며 수많은 시민들이 시청광장에 운집한 ‘100만 촛불 대행진’이 그것이다. 

그리고 2008년 6월10일은 농민들의 친구이자 농민정치사의 한 장을 채웠던 박홍수 전 농림부 장관이 100만 촛불의 함성 속에 영면한 날이기도 하다. 당시 그는 통합민주당 쇠고기협상 무효화 추진위원장, 사무총장을 맡아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당무와 함께 쇠고기 협상 관련 대정부 투쟁을 맡아 동분서주 하던 중 심장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떠난  지 어느 덧 7년. 농민을 둘러싼 여건이 악화될수록, 생의 마지막까지 농민들을 위해 삶을 불살랐던 그의 철학과 열정이 아쉽기만 하다.  

고 박홍수 전 장관은 경상남도 남해 출신으로 군에서 전역한 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장포리 이장을 지낸 이 땅의 농민이다. 제 9대· 10대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칠레 FTA 등 개방에 반대하는 한편 농가부채 문제를 이슈화 시켜 2002년 농가부채 특별법을 제정하는데 기여했다.

또 학교급식법 개정, 농어촌복지 특별법 제정, 농협 개혁, 마사회 농림부 환원 운동을 통해 성과를 거두었다. 모내기를 거부하는 농민파업, 고속도로 점거 투쟁 등은 그가 만든 시위형식이다. 

그는 한농연 출신으로서는 황창주 7·8대 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국회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2004년 4월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전농 출신의 민주노동당 강기갑, 현애자 의원과 함께 농민 정치시대를 꽃피운 것이다.

2005년 1월4일 농민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돼 2007년 8월31일까지 2년8개월 동안 참여정부에서 가장 오랫동안 장관직을 수행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재임 중 늘 현장에서 농민과 호흡했고, 농민중심의 농정을 표방하면서 농민교육과 후계인력 육성을 강조하고,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을 고려한 맞춤농정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그는 장관시절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끝까지 막아, 검역 주권을 포기했다고 평가된 이명박 정부와는 대조되는 이미지로 남았다. 

물론 그는 장관 재임 중 한·미 FTA 타결 등 참여정부 신자유주의 농정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재임 중 정부가 지속 추진한 FTA, 농민의 요구에 못 미친 양정개편, 미흡한 농협개혁 등 그에 대한 평가에는 공만 있는 게 아니라 과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농민을 위한 인생의 궤적은 권력과 강자의 편에 서서 말을 바꾸고 이익을 추구하는 부류와는 분명히 다르다. 특유의 승부사 기질과 선 굵은 장악력으로 농민단체 대표에서 행정가, 정치인으로 진화하면서도 그는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소신껏 농민을 대변하는 대의명분을 저버리지 않았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때 발표된 그의 재산이 마이너스였을 정도다.

생각과 방법은 다르지만, 많은 농민들이 그의 삶에서 배울 것을 찾고 있다. 최근 일부 농민단체 수장들 주변에서 이런 저런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늘 농민을 중심에 두고 결단했던 그와 대비된다.

“혼자 꾸면 꿈으로 그치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던 그의 말이, 소탈하고 친근한 그의 웃음이 되살아난다. 농민을 위한 세상을 함께 꿈꾸던 박홍수가 생각나는 6월, 그가 잠든 창선면 부윤리 소나무의 푸르름이 짙어가고, 그가 자란 장포리 바다는 쪽빛으로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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