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중앙대 명예교수,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 대표

 

이제 한 달이 지나면 갑오년(甲午年)이 가고 을미년(乙未年)이 온다. 그 다음해는 병신년(丙申年)이다. 을미년엔 쌀 시장이 전면 개방되고 한·중 FTA(자유무역협정)까지 완전 체결된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경제영토가 세계의 73%로 확대됐다는 흰소리가 박근혜 정부 일각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40여개 나라들과 동시다발적으로 FTA를 추진했던 이명박 정권 때의 데쟈뷰(旣視感)가 떠오른다.


불길한 갑오년의 기시감(旣視感)

새 정부가 들어 이태 동안에 벌써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 영연방과 터키, 중국과의 FTA가 타결됐다. 마치 FTA에 신들린 것 같다. 이제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미국, EU, 중국, 인도 등 세계 최강국들과의 자유무역(관세철폐) 협정이 타결되고 환태평양 12개국과의 동반자 협정(TTP)마저 가입되면 실질적으로 세계 최다 FTA 체결국가로 우뚝 선다. 그만큼 우리 경제가 세계 농업강국들에게 완벽하게 포위, 예속된다는 뜻이다. 3농 부문을 이들의 단골 사냥감으로 내놓고 농업을 가리켜 ‘미래성장산업’이라 부른다.

장차 우리나라 민생경제와 농업, 농촌, 농민, 3농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10년 후 2025년 쯤엔 식량자급률이 15%나 유지될까. 60년 후 다시 갑오년이 오는 2074년이면 우리 민생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자못 불안하다. 그에 대한 궁금증은 이미 전봉준·손병희의 갑오 동학농민혁명 때 백성들이 즐겨 불렀던 노랫말(“가보세(甲午歲), 가보세, 을미적(乙未賊) 을미적 대다가, 병신(丙申)이 되면 못가리”)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노랫말 예언은 그대로 이뤄졌었다. 사대당쟁과 암우(暗愚)한 지도력, 그리고 외세의 각축으로 민생은 날로 피폐해지고 국력은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다. 마침내 500여년의 조선왕조가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

동학농민혁명 진압을 구실로 일본, 청국 군대가 한반도에 진주했고 청일전쟁이 일어나 연이어 노일전쟁까지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조선반도는 일제 영향권에 들어갔다. 나라 안에서는 일본제국에 부화뇌동하는 정치집단이 생겨나고, 나라 밖에서는 1905년 6월 일본 총리 가쯔라 다로(桂太郞)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 W.H. 태프트 미 육군장관 사이에 이른바 ‘가쯔라-태프트 비밀협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대한제국을 지배하에 넘긴다는 밀약이었다. 그리하여 1905년 11월17일 한일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고, 마침내 1910년 8월22일 일·한 합병이 이루어졌다. 나라와 백성 할 것 없이 병신(病身)이 되었다. 이완용 당시 학무대신(후에 총리)은 “선진국 일본에 합병 귀속되는 것이야말로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라고 역설하였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불후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고 설파하였다. 연달은 FTA로 인해 우리나라 민생과 3농 부문의 국정 운영이 바야흐로 방향타를 잃고 몰락의 길에 들어서 대한제국 말기의 쇠약해진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농촌 방방곡곡 도처에 젊은이들은 보이지 않고 노령층과 부녀자들의 한숨소리만 드높다. 쌀값과 각종 농산물가격 그리고 농가소득은 1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제자리걸음이다. 농업을 ICT와 연계 복합화하고 스마트화 하자는 사설이 “농업을 직접 챙기겠다”던 약속의 다른 말인지, 허약한 농민들을 무한경쟁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농업문제는 시장경제에 맡길 수 없다”던 말의 다른 말인지 도무지 종을 잡을 수 없다.

사료곡물을 포함한 식량자급률은 23%대로 떨어졌고 주곡인 쌀의 자급률은 86% 대로 물러났다. 축산업 또한 영연방 국가들과의 FTA 체결로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격이다. 그나마 돈이 되는 식품제조 가공 무역업은 대부분 대기업 매판자본들에 의해 독과점 되어 식품이 많이 생산되어 수출이 늘어날수록 외국 농수산물과 해외 식재료의 수입물량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실제 우리나라 농업 농촌 농민의 순발전과는 유리된 채 외국의 농부들, 외국의 수출메이저와 국내 수입·가공·무역업자들만 살찌우는 것이 ‘新 창조농업’이다. 쌀 개방에 따라 떡볶이 200만 달러를 수출한 것이 ‘창조경제’라면 더 할 말이 없다. 한없이 가볍고 짧은 발상으로야 무슨 말 잔치인들 하지 못하랴.

그리하여 민초들은 묻는다. 정부의 각종 경제정책이 누구를 위하여, 누구의 이익증대에 보탬이 되는가! 단순히 국민총생산액(GDP) 기여도를 높이고 그렇게 가공 조제된 외국산 GMO 식재료의 식품산업이 우리나라 농가소득을 얼마나 높였으며, 도대체 낙수(trickle-down) 효과라도 일어났는가. ‘국익’이란 말뿐이고 ‘그림 속의 떡’이다.

도리어 GNP와 수출액이 높아가는 곳에 숨 쉴 공기(미세먼지), 마실 물만 탁해지고 국민들이 먹는 음식의 안전성(安全性)마저 위협받고 있다. 국내 소비자 서민들의 가계와 소득 그리고 식생활의 안전망마저 바람 앞의 등잔불이다. 아아, 대기업, 기득권자들만 잘 살게 되는 세상이 과연 국가 이익이며 미래성장산업이란 말이던가. 민생경제와 삶의 질로 따져 본, 참다운 민생 지표는 마이너스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다.


농정기구부터 구조조정해야 마땅

농가인구는 이제 총인구의 5.7%로 줄어들었고, 농림업 생산액은 국가 총생산액의 2.1%로 추락했는데도 웬 농림축산 관련 행정 및 공적기관은 그렇게도 많은가. 쓸데없이 벌리는 전시 위주의 사업과 조직 인원은 왜 그렇게도 넘쳐나는가.

우리 농업이 미국 유럽 중국과 하나의 경제통상권으로 통합되면, 그들이야 여전히 따북따북 월급 수당 연금을 챙기겠지만 농업, 농촌, 농민, 3농은 명맥이나 유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들 농업관련 기관들을 확 줄이고 하던 일을 축소하여 임직원 수를 대폭 줄인다면 그에 지출되는 각종 예산과 비용, 임금이라도 대폭 절약하여 항간에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호당 월 50만원 기본소득안”의 실현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 길이 되레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구농(救農)대책이지 않겠는가. 갈수록 민생이나 3농 발전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영혼이 없는 공직자들일랑 국민세금을 좀먹는 벌레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먹혀들고 있는 것이다.

국내 농축산업 자급률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수입량이 그 몇배로 폭주하면서 농촌에 농가와 농민들마저 급속히 줄고 사라지고 있는 마당에 아예 농림축산식품부는 명실상부하게 「농식품수입부(輸入部)」로, 농협은 「NH은행」으로, 그리고 기초 및 도 단위 농업협동조합과 농수산물유통공사는 그냥 개별 회사체제로 전환시키자는 주장이 솔깃하게 들린다.

농촌진흥청과 농어촌공사는 쓸데없는 일로 무위도식하는 사업들과 부문을 과감히 도려내어 본래 설립 때의 기능과 출범했을 때의 이름(正明)에 걸맞는 고유기능만 남기고 대폭 축소 개편한다면, 고육책이지만 농가 기본소득 재원(財源)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여간 솔직하지 않다. 마치 15년전 IMF치하 농조·농조련·농업진흥공사를 축소 통합하여 수세(水稅)를 완전히 폐지하고 농·축·인삼협 중앙회를 축소 통합해 농업금리를 대폭 내렸듯이, 현재의 농림축산 식품 관련 모든 공적조직과 기능을 엄정히 재평가 재단(裁斷)해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명실공히 3농 부문의 창조경제가 아니겠는가.


농림축산 예산·권한 지자체 이양을

동서고금에 농정이란 본래 local(현장) 중심, 농민 중심 행정이었다. 그러니만치 농림축산 관련 예산과 권한을 대폭 지방자치단체에 이양하여야 맞다. 그 절약분으로 농가 실질소득을 높이자는 주장이 점점 더 힘을 받고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예산과 세원(稅源)을 현재와 같은 8:2 체제에서, 선진국처럼 2:8 체제, 아니면 적어도 5:5 체제로라도 만들어 진정한 지방자치제를 정립한다면 3농의 앞길이 제대로 열릴 것 같다. 이른바 지방분권제 확립이다. 그런데도 지금 미래 성장산업으로 농업을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대기업들을 불러들여 기업적 농축산업과 종자사업, 6차식품산업마저 맡기려는 기도가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그럴 바에야, 아예 사람(농민) 중심의 행정과 권한 그리고 예산과 세수(稅收)를 지자체에 넘기고 중앙정부는 기업적 공장식 농축산업과 유통, 식품제조가공업, 특히 수입업무나 관장케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농민단체들의 주장에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그리하여 잔류 농민들은 월 기본소득 50만원을 보장 받으면서 중앙정부의 획일적 농정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 협동농업형태, 즉 진정한 농민협동조합으로 거듭나게 하여, 깨어 있는 소비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직거래, 꾸러미 사업, 로컬푸드, 슬로우푸드, 기타 농외소득 사업으로 자생케 하는 것이 선진국형 농정의 바람직한 모양새이다.


이 땅에 농부·서민으로 태어나서

그동안 관변단체, 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45여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최근의 대형 FTA 타결로 순국민총생산액은 추가적으로 매년 3-4%씩 늘고 수출액도 크게 늘었어야 했는데 웬일인지 GDP나 수출액 증가는 FTA 하기 전보다 더 더디고 수입량만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경제영토가 73%로 더 늘어난 것이 아니고 수입 영향이 92% 이상 확대되어 맨먼저 농촌경제의 파탄부터 불러들이고 있다.

그 결과가 다름 아닌 안전성이 결여된 수입농산식품의 홍수 범람이며, 농촌경제 침체, 서민경제 악화이다. 순풍순우하여 고추, 마늘, 양파, 배추 농사를 잘 지어봤자 뭐하나. FTA가 아닌데도 중국산 김치가 20여만톤이나 수입되어 시장가격이 풍비박산 농산물마다 값이 이태째 반토막인데, 이제 FTA 좀비들이 판치는 완전수입개방 세상이 되면 농민들에겐 뭐 하나 돈 되는 것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아직 한중 FTA가 완전히 발효되지도 않았는데 지레 올해의 가을 쌀값과 농산물가격들은 꽁꽁 얼어붙어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40% 관세하에서도 미국, EU,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산 쇠고기와 돼지고기, 낙농제품들이 시장의 과반을 점령했는데 축산선진국들과 FTA가 발효되면 사라질 날만 카운트다운 해야 한다.

“뭐 돈되는 것 없소?” “해볼만한 품목은 뭐가 남았소?” 농부들은 산과 내와 들에서 서로 묻고들 있다. 두 나라 정상회담을 기념하여 한·중 FTA가 타결됐다는 소식이 알려지기도 전에 심지어 고사리, 도라지, 더덕, 약초 농사마저 흔들흔들 추락직전이다. 이 시대, 이 땅에 농부 서민으로 태어나서 요즘처럼 무기력하고 무위 무능한 무존재의 신세가 된 적이 단군 이래 또 언제 있었던가!

“을미적 을미적 대다가는 병신된다”더니 2015-6년 을미·병신년이 오기도 전에 밤 보따리를 싸야 하나? 아니 싸야할 보따리도 없는 고령층·부녀자 3농은 송두리째 밀려나야 하나.

말로만, 농업을 첨단 기술집약 산업으로 키워서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을 한겠다고 믹스커피, 초코파이, 떡볶이를 수출하는 대기업을 불러들여 혹시나 한술 더 떠 정부 소유의 쌀 보리 콩 등 곡물종자사업마저 GMO(유전자조작 생물체)로 만들어 황금종자사업이라고 퍼뜨린다면 더 빨리 우리 농업을 망치게 할지 걱정된다. 그런데도 그 떡고물 부스러기나 행여 한자리라도 건지려고 고매한 정·관·학·언론계 ‘농’자 붙인 앵무새족들이 지금 흰소리를 읊조리며 정부와 기업 주변 언저리를 어정대고 있다. 가련할 손, 농투성이 농민들일랑은 태평가나 부르며 텅 빈 가슴을 달래야 할까보다.

“이 풍진 세상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네 마음이 족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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