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438번지에 위치한 향토유적 제14호 영월암(映月庵)은 이천의 진산(鎭山)인 설봉산 주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천의 대표적 유서 깊은 고찰인 이 곳은 문헌상으로는 조선 영종 36년(1760)이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이천지와 1899년에 나온 ‘이천군읍지’에는 ‘북악사(北岳寺)’로 나타났으나 이후 ‘영월암’으로 불러 오고 있으며 현재는 조계종으로 소속되어 있다.

지금부터 1300여년 전 신라 제 30대 문무와 대 해동 황엄종의 개조인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문헌이나 금석문 등 신빙 자료가 없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주지 보문스님>
그러나 경내에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여래입상(보물제882호)과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 석조, 3층석탑 등의 유물, 유적 등이 남아 있어 유서 깊은 고찰임을 입증해 준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볼 때 영월암의 창건 연대는 대략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의 대웅전 건물은 1949년 청암 김명철 스님이 이천향고 명륜당 앞에 있었던 퇴락된 풍영루 체목으로 옮겨 짓다가 6.25 동란의 발발로 중단된 것을 1953년 11월 당시의 주지의 김해웅 스님이 준공하였다.

<은행나무>
절 앞에 있는 일근(根) 2주(柱)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640년을 헤아리는데 고려말의 고승 나옹 대사가 절에 머물 때 꽃아 놓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신비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보물 제822호로 자연 암석을 다듬어 머리와 두 손만 얕게 부조하였고 옷 주름 등은 선각으로 처리한 높이 9.6m의 입상이다. 둥근 얼굴에 눈, 코, 입을 크고 뚜렷하게 조각하였는데 지그시 감은 눈, 넓적한 코, 두툼한 입술 등은 온화한 인상을 준다. 머리는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없는 민머리이며, 목에는 번뇌, 업(業),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있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는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은 안쪽으로 향하고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유견편단 형식의 옷은 몸 전체에 유연한 사선으로 흐르고 왼팔을 돌아 내려간 가사 끝단은 지그재그 모양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이 불상은 유례가 드문 마애조사상으로 양식과 영월암에 전하는 석불좌대와 광배, 석탑재 등을 볼 대 조성연대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석조광배(石造光背) 및 연화좌대(蓮花座臺)>
화강암 1석으로 조성한 광배는 끝이 뾰족한 주형거신광의 형태로 다듬어져 있다. 표면에는 2조로 된 유기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나타냈고, 두광 복판에 원을 중심으로 단엽 8판의 연잎을 둘렀으며 주위에는 화염문과 당초문이 있다.

연화좌대는 정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의 하대석과 역시 8각의 안상, 앙련좌, 복련좌의 4부분을 1석씩으로 조성, 연결해 높았다. 섬세하고 유려한 조작 솜씨는 뛰어나며 특히 불신을 떠받고 있는 앙련좌에 새겨진 연잎들은 방금 피어오른 듯 생동감에 넘쳐 있다. 전체 높이는 107cm이다.

홍치선hongcs@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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