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부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협동조합을 알게 되면서 내가 지역농협과 조합원 농민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일이 있다. 대통령 농수산수석비서관으로 일할 당시 협동조합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농협중앙회 산하에 자회사로 ㈜농협유통을 만들게 한 일이다. 1994년 5월 발생한 농안법 파동 당시 나는 사태 수습방안의 하나로 도매시장을 거치지 않고 산지와 소비지를 직접 연결하는 유통의 새 길, 즉 신유통의 길을 내자는 생각을 했다.

협동조합 모르고 ‘농협유통’ 설립

산지는 지역농축수협을 중심으로 RPC, APC, LPC 등 농축산물 종합처리장, 간이집하장, 산지가공공장 등 다양한 농축수산유통시설을 만들고, 소비지에는 도매물류센터를 만들어 직거래를 하도록 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소비지 도매물류센터는 농협중앙회가 담당하도록 했다. 중앙회는 생산자단체가 어떻게 소비지에 도매물류센터를 짓느냐, 어떻게 협동조합이 주식회사를 자회사로 만들 수 있느냐며 반발했지만 나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렇게 해서 1995년 5월 협동조합 역사상 처음으로 농협중앙회 자회사로 ㈜농협유통이 탄생했다. 

솔직히 그 당시 나는 중앙회와 지역농협의 법적지위와 역할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막연하게 농협이 하면 모든 일이 농민 조합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착각했다. 농협유통의 소유와 지배구조가 어떻게 돼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때 내가 만일 지금만큼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면 농협유통을 기업이 아닌 협동조합회사로  만들었을 것이다. 농협유통을 중앙회의 자회사가 아니라 주식의 60~70% 정도는 지역회원조합이, 20~30% 정도는 조합원이, 나머지 10~20% 정도는 중앙회가 공동으로 출자한 독립된 협동조합적 농협유통회사를 만들었을 것이다. 협동조합의 원칙에 따라 지역조합과 조합원이 소유·지배하고 이용하는 유통회사가 되도록 하고, 경영은 유통전문가를 선임 전담케 하고 지금과 같은 중앙회(장)의 불필요한 경영과 인사개입을 철저히 막고 소유와 경영도 확실하게 구분했을 것이다. 농협유통을 잘못 만들었구나하는 생각을 처음 가지게 된 것은 정대근 회장 체제 이후 농협유통이 협동조합의 정신과 원칙에서 벗어나 대형유통업체들과 같이 지역조합을 일개 납품업체로 취급하고, 이들을 상대로 마진장사를 하고 수익의 대부분은 중앙회와 농협유통과 임직원을 위해서 사용하고, 결국 지역조합과 조합원 농민을 위한다는 것은 명분으로 내세우는 말뿐이란 현실을 알게 된 뒤부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회는 많은 자회사를 만들었고 차츰 정체성이 불분명한 거대한 기업집단이란 괴물로 변해 갔다. 이를 고치자고 지난 3월 중앙회 사업 분리를 위하여 금융지주를 만들고 앞으로 경제지주를 만들기로 했지만 결국은 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란 우려가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잘못과 우려가 18년 전 나의 협동조합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을 하니 농민 조합원과 지역조합에게 미안하고 송구스럽기만 하다. 

조합원에 도움 주리라 기대 무색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는 공정거래법에 따라 농협중앙회를 41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 이렇게 되면 농협중앙회 산하 금융지주와 그 자회사는 물론 중앙회 자회사는 내부거래 공시대상이 되어 계열사 간 상호출자제한 등 내부거래에 제약을 받게 되고, 사모투자 모집, 일선조합 사업 참여 등도 제약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중앙회는 조합원과 회원조합을 위한 실익사업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공정거래법 일부 조항의 중앙회 적용배제를 위한 농협법 개정을 농림수산식품부에 건의했고 농식품부는 이를 수용하는 농협법 개정안을 지난 8월 13일자로 입법예고했다.

금년 12월 1일 발효예정인 협동조합기본법은 대통령이 정하는 요건을 갖춘 협동조합에 대해서는 공정거래법 적용을 배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는 그 요건을 소규모 협동조합으로 제한하고, 조합원에 의한 설립과 조합원에 의한 평등한 의결권 보장, 조합원에 대한 이익배분 등의 요건을 제시하고 있다. 조합원간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협동조합적으로 운영되는 협동조합에 한하여 매우 제한적으로 공정거래법적용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지역조합은 적용배제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중앙회는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농식품부가 공정거래법 적용배제를 위해 농협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협동조합기본법의 정신과도 맞지 않은 농협중앙회에 대한 부당한 특혜조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농협금융지주와 그 자회사는 물론 중앙회 자회사의 소유와 지배구조도 협동조합적이지 못하고 사업방식도 일반기업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지난 3월 사업 분리 이후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워 중앙회가 지역농협과 경쟁하며 경제사업 기반을 확충하고 지역농협의 사업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는 현실에서 중앙회의 무절제한 지역사업 참여제한은 지역농협을 위해서도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협동조합방식 농협법 개정 우선

이런 관점에서 농식품부가 앞장서서 추진하고 있는 농협법 개정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 오히려 농식품부는 이번 기회에 앞으로 설립될 경제지주와 그 자회사를 포함해 현재 운영되고 있는 농협금융지주와 그 자회사의 소유와 지배구조를 기업적 방식이 아닌 협동조합방식으로 전면 개편하기 위한 농협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 차제에 농협중앙회는 자회사가 회원조합과 조합원 농민에게 진정으로 실익을 주는 협동조합 사업체로 거듭나는 자기혁신을 통해 협동조합으로서 정체성을 바로 잡고 공정거래법 적용배제를 당당하게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농협중앙회도 이정도로 성장했으면 이제는 편법과 꼼수에서 벗어나 당당히 정도를 걸을 때가 되었다. 그리고 바른 협동조합이 무엇인지를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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