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범 여민동락공동체 대표

[한국농어민신문]

그는 “희망은 만드는 것”이라는 상투적인 대답보다 “희망은 몸에 새겨진 버릇”이라는 게 적절하다 했다. 단순히 낙관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몸의 버릇이라는 이야기다.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
 

이맘때가 되면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나온 한 해를 차분히 성찰하고 새해 이뤄갈 희망들을 새긴다.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을 기원하고 더 크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며 이번만큼은 꼭 달성할 것이라는 간절함이 넘친다. 물론 현실에선 작심삼일이거나 백일몽에 그치기도 하지만 이때만큼은 그런 호기도 인정되는 법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몇 글자 적어 여민동락 식구들, 회원들과 공유하던 신년인사도 아예 포기했다. 묵상의 시간은 길어지고 궁리 끝에 나오는 희망은 꺼내기가 어려웠다. 코로나19로 벌어진 일상의 뒤틀림과 가늠하기 어려운 미래가 2021년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2020년은 첩첩산중,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특히 농촌은 '불난 집에 부채질'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나'를 뿌린 격이다. 인구감소와 과소화, 고령화라는 농촌의 위기를 주민 중심의 커뮤니티 복원과 활성화로 극복하고자 했지만 코로나19로 그나마 유지되던 것들도 대부분 멈춰버렸다. 대면 중심, 사회적 관계의 확장이 모든 활동의 기본이었는데 그것을 제약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으니 답답함을 넘어 일상의 불안으로 이어졌다. 작년 한국 사회 곳곳에서 코로나19로 벌어지는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사회에 대한 각종 진단과 담론이 쏟아졌다. 수시로 찾아보고 정독하며 다수의 자리에 참석도 해보았으나 대부분 담론 수준을 넘어서질 못하고 있었 다.

심지어 작년에 참여했던 어느 세미나에선 코로나19로 찾아온 비대면과 언택트 사회가 자본과 학벌, 차별을 해체하고 민주주의와 더 큰 자유를 줄 거라는 학자도 계셨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과 정반대의 진단을 내리는 그 말씀에 모두가 나처럼 당황해서 아무런 반론을 안 했던 것인지,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의 판단 유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찌 되었든 현실에선 여전히 코로나19로 다수의 삶은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살림의 격차는 극도로 벌이지는 이 난국에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어떤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작년 말 여민동락 모든 식구가 모여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의 포부를 공유하는 하반기 워크숍이 열렸다. 매년 연말에 열리는 이 자리는 원래 외부 손님 없이 온전히 식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깊이와 넓이는 다를지 모르나 다른 삶, 다른 세상을 꿈꾸며 여민동락에 합류했던 18명 그 마음들을 되돌아보고 11월부터 사업단별로 이뤄진 평가와 차년도 계획을 이날 공유한다. 그리고 여민동락 막내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만든 상을 한 해 고생한 식구들에게 직접 수여하며 격려하고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유쾌한 자리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코로나19시대에 도통 찾기 어려운 희망을 주제로 강사 한 분을 모셔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팬데믹 시대에 걸맞게 “농업, 농촌의 현실과 희망”이란 다소 무겁고 진중한 주제였다. 이전에 없던 2시간짜리 강연이라 식구들도 긴장했지만 이 시기에 아무리 많은 강연과 연구로 단련이 된 강사라도 정말로 어렵고 긴장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요청한 강연 주제에 난감해하셨다고 강연 첫머리에 포문을 여신 그는 '희망은 만드는 것'이라는 상투적인 대답보다 '희망은 몸에 새겨진 버릇'이라는 게 적절하다 했다. 단순히 낙관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몸의 버릇이라는 이야기다.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 구체적인 통계가 섞인 농업, 농촌의 현실만 들었다면 우울했을지 모른다. 해법으로 이야기되는 것들도 쉽사리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들었을법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어느새 숨어버린 이 희망의 되새김만으로도 그날 강연은 나에게 최고였다.

경쟁과 각자도생이 아닌 서로 돕고 협동하는 상호부조의 삶,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돈, 권력, 학벌과 무관하게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생의 지역사회를 만드는 일, 늘 여민동락이 꿈꾸고 살고 싶은 삶이지만 아름답고 고귀한 이상일수록 현실에서 생명력을 얻는 방법은 일상에서 꾸준하게 몸으로 실천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매년 여민동락을 찾아오고 강사로 현장사례를 공유하지만 그 속에 무슨 논리 정연한 이론이나 완성된 해법이 있지는 않다. 시골 할머니들이 시집온 뒤로 70년을 한결같이 텃밭에 풀을 뽑듯 15년간 끈질기게 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15년간 이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코로나라는 상황에 맞게 실천하면 될 것을 너무 겁먹은 것 아닌가 했다. 사실 코로나19가 발생한 원인과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의 근본 배경은 똑같은 것 아니었던가.

단순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1년간 익숙해진 방역지침은 철저히 지키되 지역내에서 대면과 관계의 확장은 지속한다. 모이고 수다 떨고 꿈을 꾸는 사람들, 더불어 사람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실천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할 것이다.

여민동락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협동과 연대의 세상' 이 마음 다시 심장에 품고 아래로 더 깊이 스며들어 '머리가 아닌 손발로 만드는 희망'의 버릇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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