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농지법」 제정의 역사적 의의는 농지개혁사업 이후 제기된 영세소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ㅣ 박석두 / GS&J 인스티튜트 연구위원

한국 근·현대 농지제도의 역사는 1910∼1918년에 일제가 시행한 조선토지조사사업, 1950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실시한 농지개혁사업, 그리고 1994년 「농지법」 제정의 3단계로 시대구분을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들 사업과 법 제정의 역사적 의의와 성과 및 한계를 통해 앞으로의 농지제도의 과제를 살피고자 한다.

1910년 8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한 일제는 1910∼1918년에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사업의 목적은 임야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토지(임야에 대해서는 1911∼1922년에 임야조사사업 실시)에 대해 측량을 통해 위치·지번·지목·지적·지위등급·지가·형상 등을 필지별로 정확히 파악해 소유자를 확정하고 등기부와 지적도 및 토지대장 등 절대적·배타적인 소유권을 법적으로 부여하는 제도적인 수단과 장치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사업의 결과 과세지와 국유지 면적 증대, 등기제도에 의한 토지상품화 증대, 행정구역 개편과 경계 확정, 지가 기준의 근대적 지세제도 확립, 등기부 등 토지 관련 공부 작성 완료 등의 성과를 거둠으로써 사업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역사적 의의는 근대적 토지소유제도가 확립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 이전과 비교하면 민법과 등기제도 등에 의해 절대적·배타적인 토지소유권이 법적으로 보장된 것이다.

그러나 사업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의해 식민지지주제가 확대됨으로써 농가경제가 피폐해지고 소작쟁의가 격화되었다. 소작지 비율은 1919년의 50%에서 1936년 58%로 증가하였으며, 자작농의 비율은 1916년의 20%에서 1932년 16%로 감소한 반면 순소작농의 비율은 37%에서 53%로 증가하였다. 1932년에 총 농가 호수의 3.5%에 지나지 않는 지주들이 80%를 차지하는 소작농가를 지배하였으며, 전체 논 면적의 67.3%와 전체 밭 면적의 50.1%를 소유하였다.

광복 직후 1945년 말 전체 농지 222만6000 정보 중 소작지 면적은 144만7000 정보(65%)에 달했다. 따라서 당시 제1의 정치적 과제가 민족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었다면 제1의 경제적 과제는 토지개혁이었다.

북한은 1946년 3월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1946년 2월 토지개혁법 초안을 작성하게 한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1950년 3월 개정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기까지 4년이 경과하였다. 그동안 지주들은 소작지를 사전 방매하였고, 미군정은 1948년 3월에 귀속농지를 매각했으며, 농지개혁은 1950년 3월부터 시작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0년 10월부터 재개되어 1951년 3월에 농지분배가 완료되었다.

지주들에 의한 소작지 사전방매 면적은 71만3000 정보(1945년 말 소작지 면적 144만7000 정보의 49.3%), 귀속농지 매각 면적은 26만2502정보(18.1%), 농지개혁법에 의한 분배 면적은 34만2365정보(23.7%)였다. 농지개혁에 의한 자작농 창설은 지주와 정부의 합작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지개혁의 역사적 의의는 반봉건적 지주제의 해체와 자작농체제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작지 면적은 1945년의 65%에서 1951년 8%, 1960년 12%로 줄었으며, 소작농 비율은 1945년 49%에서 1960년 6.7%로 줄었다. 자작농체제가 확립됨으로써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였으며, 토지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고 양질의 노동력이 공업 부문에 공급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업 이후 곧바로 농지법을 제정하지 못하여 농지임대차가 급증하게 되었고, 영세소농 생산구조가 뚜렷해졌다. 자작농 비율은 1960년 60%에서 1990년 31%로 감소하였으며, 임차지 면적 비율은 같은 기간 11%에서 37%로 증가하였다. 또한, 1ha 미만 경작 농가의 비율은 73%에서 58%로 감소한 반면 1∼3ha 농가의 비중은 27%에서 38%로 증가하였다.

농지법의 제정 배경은 1994년 WTO 출범에 따른 농업의 국제경쟁력 향상과 농촌 활력 증진을 위해 농업구조개선을 효율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농지제도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농지법과 직접 관련되는 사업은 없었으나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권의 농업구조 개선을 위한 농업정책이 모두 농지법 관련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이후 현재까지 25년에 걸쳐 농업구조개선 정책 사업이 시행된 결과 3ha 이상 대규모 농가의 비중이 늘고, 시설농업이 성장하는 등 농업구조 변화가 있었으나 목표로 하는 농업구조 개선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농지법」 제정의 역사적 의의는 농지개혁사업 이후 제기된 영세소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핵심 내용은 자작농체제의 유지라고 하는 「농지법」의 원래 목적과 헌법의 경자유전 원칙에 구속되어 농지소유 자격 규제와 농지 임대차 금지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동안 농지법 개정을 통해 이에 대한 규제를 계속 완화함으로써 농지임대차가 일반화되는 현실을 추인하고 있으나 경자유전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농지임대차를 적극적으로 농업구조개선과 농지이용 집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이 절대적·배타적 토지 소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지주제라는 모순을 낳고, 농지개혁이 지주제를 타파하고 자작농체제를 창설함으로써 영세소농 구조라는 문제가 등장하였는데, 「농지법」과 농업정책은 이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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