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인(충남마을만들기지원센터장)

[한국농어민신문]

지역사회 현실 체계적 수집·분석
공동학습·토론 통해 비판하는 힘 키워
농촌 사회 스스로 발전방향 결정을

매년 이맘 때가 되면 농민들이 모여 1주일간 숙박연수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료를 수집하여 국제 정세를 논하고 농정을 분석하며 공동의 대응전략을 검토했다. 농민조직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대정부 ‘투쟁’의 이슈를 무엇으로 할지도 결정했다. 이런 경험이 축적되어 행정 공무원과 정책토론도 하고 ‘맞짱을 뜰만큼’ 자기 주장을 할 수 있었다. 한 번 모이자 결의하면 열 일 제쳐놓고 모이기도 했다. 겨울철 농한기마다 먼저 학습했던 선배가 후배를 지도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고,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아직도 이런 활동이 어디선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들어보기 어렵다.

학습이란 사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배우고(學) 익힌다(習)는 뜻이다. 학습을 통해 스스로의 판단과 행동을 지각하고 새롭게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지역사회에서 집단적인 실천형태로 나타나도록 의도적으로 실천할 때 이것을 학습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학습운동이 반복되고 축적되어 행동으로 이어질 때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공동학습을 통해 객관적 사실을 인지하고 토론을 통해 서로의 ‘생각 차이’를 좁히며 지역사회의 중요한 의제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을 형성할 수 있다.

공동학습은 또 새로운 것에 눈뜨게 하고,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는 힘이 된다. 그래서 정부(행정)이 제안하는 정책도 새로운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고, 지역 현실에 맞는 새로운 대안도 발견할 수 있다. 행정의 보조사업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고, ‘정부가 시키는’ 관행적인 방식으로는 지역문제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지역마다 특색이 있으니 ‘남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가야 하고, ‘모방은 금물’이라는 점도 인식하게 된다. 

공동학습과 토론을 통해 서로가 공동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 늘어날 때 신뢰관계도 깊어지고 공동체도 살아난다. 농업과 농촌을 지원하는 정부 사업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면 정책 사업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남 몰래 나만 보조사업을 받으려는 이기주의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일찍 지원받아 나타나는 부작용도 예방할 수 있다. 옛날부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농촌사회가 스스로의 발전방향을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자치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공동학습은 매우 중요하다. 

풀뿌리 주민자치운동 영역에서도 이런 점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여러 실천 경험이 축적되어 왔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초반부터 가난한 동네에 작은도서관을 설치하자는 운동이 있었다. 책만 대여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모임도 조직하고 작은 토론회도 개최하는 활동 공간이다. 전국의 도시 지역 마을공동체운동은 대개 이런 작은도서관에서 출발하였다. 이제는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곳만 전국에 7054개나 될 정도로 확산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부터 평생학습(평생교육)운동이란 것도 있었고 1998년에 평생교육법이 제정되면서 정부 정책으로 제도화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광역 단위로 평생교육원이 설치되고 농촌 지자체마다 평생교육센터 건물이 세워지고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다. 행정에도 평생학습사가 배치되고, 담당부서도 설치되었다. 2001년부터 평생학습도시로 지자체를 지정하는 지원사업도 시작되었는데 전국에 177개나 된다. 이제는 모든 농촌 지자체에서 평생학습 프로그램 사업의 혜택을 받고 있는 셈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전국 읍면동 단위로 설치해온 주민자치센터도 이제는 거의 대부분 완료되었다. 주민자치센터를 운영하기 위해 주민자치위원회도 조직되었는데, 문재인 정부에서는 주민 대표성을 높이고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주민자치회로 전환하고 있다. 운영실태는 전국의 지역마다 편차가 크지만 이런저런 강좌 프로그램을 10여개 이상 운영하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 최근에는 주민자치센터를 평생학습기관으로 지정하여 읍면 단위 거점공간으로 육성하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외에도 문화원이나 농업기술센터 등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적지 않다. 농식품부 ‘역량강화사업’ 일환으로 마을만들기 중간지원조직이나 컨설팅기관에서도 수시로 진행하고 있다. 이처럼 주민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정말 많이 늘었다. 10명 정도가 모여서 새로운 프로그램 개설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농촌 주민들이 스스로 조직하여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례는 여전히 드물다. “누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의미의 교육만 많고, 혹은 취미 생활에 관련된 프로그램만 무성하다. 자신이 사는 농촌사회를 이해하고,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려는 차원의 학습운동은 정말 빈약한 셈이다. 

충남 홍성의 한 지역에서는 2017년 6월에 현장 연구자와 활동가, 주민들이 모여 ‘마을학회 일소공도’라고 하는 학습조직을 출범시켰다. 학회란 것이 연구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 단체 명칭을 아예 학회로 한 것이다. 또 “일만 하면 소가 되고, 공부만 하면 도깨비가 된다”는 풀무학교의 경구(警句)를 빌려 학회 이름에 ‘일소공도’란 용어도 넣었다. 학회에서는 매월 월례세미나를 개최하고, 학회지를 반기별로 발간하며, 매주 평민마을학교와 연2회 강학회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학습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또 학회 산하에 ‘마을연구소 일소공도 협동조합’도 설립하였다. 농촌 지역사회의 객관적 현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분석하면서 주민들의 학습운동을 촉진하고 응원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제는 농민들도 사시사철 바빠져 농한기가 없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공동학습의 시기를 놓치면 ‘스스로의 생각’도 없어지는 셈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행정사업의 지침을 숙지하고, 보조금 집행방식을 익히며, 정책 사업에 안테나를 세우는 농민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반성하며 전국 농촌지역마다 다양한 학습운동을 조직하자. 이를 통해 농한기마다 모여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농업과 농촌 상황을 조사하고 토론하며 어려운 현실을 함께 넘어갈 수 있는 대안을 찾아보자. 작년부터 이어지던 코로나19 상황이 적어도 올해 상반기까지는 계속 이어질 것이니 어쩌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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