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호의 ‘보통의 농정’] 실험의 시름

2025-11-25     한국농어민신문

[한국농어민신문] 

ㅣ김규호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1970년대 미국에서 쿵푸(쿵후) 열풍이 분 적이 있다. 그 흔적은 ‘킬빌’, ‘쿵푸팬더’, ‘미니언즈’ 등 유명 헐리웃 영화에도 남아있는데, 이 영화들에는 쿵푸 스타에 열광하며 자란 세대가,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풍요롭게 해준 문화 콘텐츠에 보내는 일면 헌사와 같은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훗날 계량경제학자가 된 한 소년도 당시 쿵푸에 푹 빠졌었는지, 자신의 책 「응용 계량경제학 마스터하기」란 책의 1장 첫머리를 1972년 미국 드라마 ‘쿵푸’ 속 스승과 제자의 대화 한 대목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제자가 말한다. ‘한 인간의 일생은 이미 명부에 적혀 있습니다. 인간은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스승이 답한다. ‘하지만 누구든 자신이 선택한 대로 살 수도 있네. 그 두 가지가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둘 다 맞는 말이지.’

이 사람의 이름은 조슈아 앵그리스트(Joshua D. Angrist). 202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MIT 경제학과 교수다. 사회과학 연구자에게는 자연과학처럼 뭇 여건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실험실’과 같은 상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때, 관련 데이터를 어떻게 확보하여 인과관계를 분석할 수 있을지가 그의 주된 관심사다.

가령 우리가 어느 한 정책의 영향을 다른 여러 정책이나 요인으로부터 정확히 ‘식별’하고자 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정책 효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평가 프레임워크, 조사 설계, 데이터 수집 및 분석법을 가능한 한 사전에 섬세하게 계획할 필요가 있음을 권고한다. 이미 ‘확정’된 정책이라도, 우리는 그 세부를 설계하고 평가하고 조정하는 노력을 ‘선택’함으로써 종착점까지 최적 경로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지난 10월, 7개 군이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사업지로 선정되었다. 농어촌주민과 농어민, 청년농어민 등 대상이 조금씩 다르긴 하나 9건(2025.11.23. 기준)의 관련 법안도 발의되어 있고, 당초 약 1703억원이었던 정부의 관련 사업 예산안은 국회 농해수위를 거치며 약 3410억 원으로 두 배 이상 늘어 최종 심사 단계에 들어간 상황이다. 군 단위가 아닌 읍·면 단위로 선정해야 했다는 이야기, 공모라지만 지역별로 안배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 주민자치나 사회적 경제 등의 정책과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 등 여러 의견이 활발히 공론장에 제출되고 있으나, 이 ‘시범사업’의 효과를 어떻게 분석하고 그 결과를 정책에 반영해갈지에 대한 논의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정부가 시범사업지 발표 당시 성과지표와 분석 방법 등의 평가 체계를 연내 마련할 계획임을 밝히기는 했지만, 이후 그 준비 상황이 따로 알려지지도 않았거니와 실상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느낌이다. 그래도 될까. 왜 우리는 출발선에 서서 마치 도착지인 듯 들떠 있는가.

짐작되는 이유 중 하나로 우리나라에서의 ‘시범사업’은 정책실험이기보다는 전면적 도입을 위한 점진적 추진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사업 결과에 따라 본사업화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사업화 하기는 할 텐데 예산과 수용도와 정치적 부담 등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시작하는 사업을 일컫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법과 제도 정비 없이도 시작할 수 있고, 일단 작게 시행해야 다음 해 예산이 늘기 쉬우며, 지자체나 부처 간 이해관계 조율의 부담도 덜하고, 혹시 잘 안 되더라도 ‘시범사업’이었다는 안전장치가 있는 식이다. 이는 정책의 효과가 불확실한 만큼 먼저 소규모 정책실험을 설계하여 비용, 효과, 부작용, 수용성 등을 검증해 본 뒤 본사업 여부를 결정하는, 우리가 교과서적으로 생각하는 ‘시범사업’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의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사업은 지역 전체를 단위로 한 보편적 기본소득 실험이고, 공모를 통해 지역을 선정함으로써 대조군이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형태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여느 정책사업처럼 관리·운영해서는 인과 추정이나 일반화 가능성 판단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지금껏 해외에서 기본소득, 또는 현금 이전 실험을 해도 개인이나 특정 인구집단이 대상인 경우가 많았고, 지역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마을별로 실험군과 대조군을 나누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던 데는 ‘무작위 통제실험’이나 ‘준실험적 방법’ 등으로 불리는 정책 효과의 실증분석 수단을 염두에 뒀던 이유가 크다. 관련 연구자들은 대개 이를 통해 정책을 증거 기반으로 설계하고, 향후 정책 확대 여부도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내년 본격적인 실시를 앞두고 이제 정교한 정책 평가 설계에 골몰할 때다. 정책은 언제든 시작할 수 있지만, 평가 설계는 사전에 끝내지 않으면 추후 인과적 해석이 매우 어려워진다. 지역경제와 상권, 이동과 정주 양상, 사회관계망 등을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군 단위 사업 방식의 장점은 살리면서도, 읍면 단위로 사업 운영 모델을 달리하거나 유형을 구분하여 정책 효과를 실증할 수 있는 방법의 모색, 유사 군 단위 지역의 방법론적 매칭, 행정자료 연계 등에 필요한 개인정보와 데이터맵 등의 작성 등 실질적인 준비에 힘써야 할 것이다.

앵그리스트는 「응용 계량경제학 마스터하기」의 5장에서 재차 ‘쿵푸’ 드라마의 대사를 인용한다. ‘목수가 집을 지으면서 못을 박았더니 못이 구부러져 버렸어. 그렇다고 해서 못이란 죄다 못 믿을 것이라며 집짓기를 그만두어야 할까?’ 사람에 따라 집이 농어촌 기본소득이고 못이 정책 평가 방법일 수도, 혹은 집은 농어촌 지속이라는 큰 목표이고 농어촌 기본소득이 못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라도 지금은 보다 나은 실험을 위해 시름에 겨워할 사람과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이제 막 ‘시범사업’의 닻을 올렸다. 성공이 간절할수록 검증은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