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철이 들어야 할텐데
배이슬/전북 진안
농사를 지은 지난 11년 중에서 최근 4년은 급속한 기후변화에 정신이 없었다. 평생 농사지어온 할머니들을 따라 때를 배워가며 철에 맞게 몸과 마음의 시간이 맞춰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에 덩달아 어찌할 줄 모르겠다. 더구나 이제는 할머니들도 도무지 철을 모르겠다고 혀를 내두르신다.
다른 지역보다야 늦게 피었다지만 진안에 4월 초순에 산벚나무와 조팝나무꽃, 민들레와 복숭아꽃이 함께 피어 있는 풍경은 낯설기만 하다. 더구나 못자리하는 이 시기에 하우스 안 최저온도가 2~3도였다가 하루 사이 9도, 17도를 웃돈다. 3년 전 못자리하던 날 사진에는 새벽부터 쌀쌀해 겹겹이 껴입은 식구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이제는 해뜨기 전 새벽만 지나고 나면 더워 겹겹이 입은 옷은 벗어야 일을 할 수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논에 못자리를 만들고 나면 대나무로 만든 활대를 꽂고 비닐과 부직포로도 모자라 덮개까지 더했다. 산에서 내려온 차가운 물에 볍씨가 놀라니 못자리 가생이로 둑을 쌓아 햇볕에 한 번 데워지고 못자리로 들어오게 했다. 그만큼 서리와 냉해가 깊었다는 얘기다. 진안의 만상일은 5월 7일로 5월 초까지 눈이 내린 적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초봄 깊은 추위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 탓에 옛날에는 생강이 냉해로 풍족히 들지 않으면 마을 어른들이 수확이 끝난 완주 생강밭에 생강을 주우러 가셨던 일도 기억이 난다.
달라진 기후는 못자리 풍경에서도 드러난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10여 년 전부터는 못자리에는 하얀 부직포만 덮었다. 물을 둘러대지 않고도 비닐을 덮지 않고도 모가 추워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4년여 년 전부터는 마을에 못자리를 직접 하는 집이 없어졌다. 하우스에서 키우거나 지역 농협에 주문해서 심었다. 볍씨를 달리하기도 하고 논에서 커야 물을 넉넉히 마시고 논에 적응하는 법이라며 자타공인 모 키우기 선수였던 할머니 덕에 우리 집만 논 못자리를 고집해왔다. 할머니 없이 못자리를 돌볼 엄두가 나지 않아 올해는 모판을 주문했다.
깡깡 얼어붙던 마을 냇가가 얼지 않기 시작한 것, 겨울이면 어른 허리춤만큼 눈이 왔던 일도 있었는데 이제는 ‘카더라~’하는 말로만 전해지는 풍경이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달라진 풍경은 머나먼 옛이야기가 아니라 30여 년 사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10년 사이, 4년 사이 가속도가 붙듯이 달라지고 있다.
풍경이 달라진 것은 삶으로 맞닿은 많은 농촌 살림살이의 ‘철’을 잃게 했다. 산벚나무 피면 볍씨를 담글 때, 조팝나무꽃 피면 모내기할 때인데 꽃이 모두 한꺼번에 펴버리니 난감하다. 모내기하고 나면 올콩 심을 때 하고 보면 모내기철에 따라 들쑥날쑥하고, 그렇게 심은 콩들이 싹 터야 할 때는 가물고 콩이 들어 꼬투리가 말라야 할 때는 연신 비가 내리기 일쑤다. 어느 해에는 올콩만 들고 어느 해에는 올콩 늦콩이 모두 아작이 난다.
‘5월 7일이 지났으니 고추모 내다심을 때’라 서둘러 내다 심었더니 10일이 지났는데도 불쑥 내린 된서리에 고추모가 얼어 죽는 일이 벌써 3년 동안 일어났다. 진안의 이른 추위에 맞춰 곶감을 깎고 때에 맞춰 김장을 하고 나면 겨울이 덜 춥고 습해서 곶감엔 곰팡이가 피고 김치는 팍 익어버리는 일도 여러 해 동안 일어났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데 그동안 쌓여온 제 때에 대한 지혜들이 뒤엉켰다. 우리의 지속 불가능한 삶의 방식 때문에 지구가 철을 잃었다. 그렇게 오롯이 지구 품에 의존하여 사는 우리도 철을 잃었다. 철이 들면 어른이라고 했는데, 철을 잃었다. 우리는 언제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어른’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철을 잃은 봄 한가운데 어제는 갑자기 여름밤 같았다. 여름밤이 가진 소리와 질감이 묻은 그 밤이 참 무서웠다. ‘올해는 어느 철에 맞춰야 하나?’ 근심 어린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