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풀과 흙으로부터 기후정의

배이슬 전북 진안

2023-03-24     한국농어민신문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기후위기를 매년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논밭주변의 자연을 보고 농사짓는 때를 아셨습니다. “울긋불긋 산벚나무 꽃이 피면 못자리 하는 때고, 들판에 하얗게 조팝나무 피면 모내기 할 때가 된 거여”라고 하셨었는데, 그말이 이제는 5년째 틀린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꽃이 동시에 피는 통에 개나리·진달래·조팝나무·산수유·생강나무 꽃을 한계절에 피어있는 진풍경이 이제는 일상적인 봄처럼 느껴질 지경이니 말입니다.

설레고 부푼 가슴으로 씨앗을 넣던 봄, 이제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어느 꽃까지 피어버렸을지, 올 해는 또 얼마나 가물지, 비는 얼마나 단숨에 쏟아져 내릴지 걱정을 안고 전전긍긍합니다. 두둑을 얼마나 높여야 하나 걱정하며 물길을 더듬어봅니다.

씨감자를 자르면서는 ‘작년처럼 감자 밑이 돌 때 가물면 또 물은 어찌 줘야 하나’ 걱정합니다. 기후변화가 아닌 기후위기라는 건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 해온 활동들이 이제는 그 활동들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기후위기를 체감하고 작은 것 하나 전환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기후위기는 이미 지속불가능 한 형태로 먹고 살아온 우리 모두의 행동 때문인데, 기후위기를 통한 고통와 슬픔은 가장 낮고 어려운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태 화석연료 펑펑 써대어 발전해온 나라들은 더 따뜻하게 풍요로워 지고 식민지를 딛고 삶을 꾸리는 나라들은 이미 땅이 잠기는 지금, 기후위기는 기후불평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 곳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기후위기를 일상으로 만나는 것은 소비중심의 도시보다 농촌에서 더 뚜렷하게 일어납니다.

평생을 한곳에서 농사지으며 살아온 경험으로 아는 ‘때’와 ‘철’이 어긋나기 시작하니 마을어르신들은 ‘감자 놓을 때가 됐어’ 하시고도 서로 ‘언제 놓을거여?! 이른가?!’ 하고 되묻습니다. 또 다른 농민친구는 ‘왜 다들 점점 더 빨리 심지?! 이제 춘분이 지나는데 고추 심을 준비까지 하시더라니까?!’ 하며 전화가 옵니다. 긴 세월 쌓여온 날씨 변화의 패턴이 달라지니 모두 어렵습니다.

그뿐인가요. 정성껏 기르고 애써 돌봐온 작물들이 긴긴 가뭄에 속절없이 타들어가거나 순식간에 쏟아 부은 비에 잠겨 물러죽는 일이 매년 반복됩니다. 속상한 마음도 모르고 농촌에서 더 적극적으로 탄소를 줄여야 한다며 논에서 탄소 발생이 많이 되니 벼 대신 다른 작물을 심으라거나, 농사짓고 난 고춧대·깻대 등 생물성 연소를 금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립니다. 

물론 누구든 몫을 다해 줄여야 지속가능한 삶을 꿈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억울합니다. 작년에 병이 들었던 고춧대라면 고온으로 발효시켜 퇴비화 하거나 태워야하는데, 미세먼지 탄소배출 감소를 위해 태우지 말라는데, 이곳저곳 ‘불멍’은 유행이라 하염없이 장작불을 태우는 것은 별 말이 없습니다. 나아가 정작 농촌에서 산처럼 쌓아 고춧대를 태운다 한들 커다란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탄소가 훨씬 많지 않을까요? 

고춧대를 태우며 비닐도 쓰레기도 태우시니 불을 놓지 않는 게 상책이긴 합니다. 다만 대안 없이 단속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을까요? 외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비재를 덜 만들고 덜 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아스팔트가 아닌 흙이 흙일 수 있도록, 작물과 풀을 통한 탄소의 저장소로, 수많은 동식물의 집으로 존재할 수 있게 농촌을 이어가는 농민들. 변화된 기후로 가장 먼저 삶이 흔들이고 있는 농민들을 타박할 일은 아닐 겁니다. 기후위기는 얼마나 심각하고 어디까지 왔는지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어떻게 정의롭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디서든 어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지금 당장 바꾸지 않으면 모두의 삶이 불투명해집니다. 

봄일이 암만 바빠도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와 함께 4월 14일에는 세종시는 못가더라도 모두 각자의 밭에서 풀로 하는 총파업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삶을 딛고 선 이 흙으로부터, 다른 모든 생명이 자랄 수 있게 그 시작을 딛는 풀로부터 기후정의를 모두 함께 나누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