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가을농사

배이슬·전북 진안

2022-09-23     한국농어민신문

[한국농어민신문] 

여름 방학이 끝났다. 여름 방학 동안 아이들이 한껏 기대한 옥수수를 멧돼지들이 먹었다고 아이들이 이르듯이 이야기 했다. 감시카메라를 달자고도 했고, 맷돼지어로 경고장을 써 붙여 놓자고도 했다. 영리하게 배로 눕혀 껍질 속 곡식만 골라 먹은 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란을 뒤로하고 진작에 넣었어야 할 배추 씨앗을 개학에 맞춰 조금 늦게 심었다. 배추 씨앗은 ‘소일블럭’과 ‘흙공’을 만들어 심었다. 플라스틱 트레이 없이 모종을 기르는 것을 2년째 아이들과 실험하고 있다.

이전에는 판매하는 시중의 종이 포트와 플라스틱 포트에도 심어 보고, 학교에서 매일 쌓이는 우유팩을 씻고 구멍 내서도 심었다. 신문지를 접어 심기도 했었다. 잘 만들어진 지식과 가치를 전달하는 것도 좋지만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올가을 농사에는 흙을 반죽해서 심는 ‘소일블럭’과 ‘흙공’, 모종을 기를 자리를 따로 내어 흙에 심었다가 옮겨 심는 ‘땅모’로 배추와 가을 상추 씨앗을 심었다. 일찍 낸 배추 모종은 유독 수많은 곤충의 먹이가 된다. 잎벌레가 속을 파고들어 구멍을 내면, 뒤처질세라 달려든 대식가 배추흰나비 애벌레도 한 몫 한다.

배추는 금세 망사가 되어있다. 1~2주 차이지만 조금 늦게 배추 씨앗을 심으면 가까워진 가을 날씨 덕에 벌레를 훨씬 덜 탄다. 추위가 이른 진안에서 배추 모종을 늦게 내면 속이 야물게 차지 않지만, 먹기에는 충분히 잘 자란다.

한 해에는 심자마자 한냉사를 씌웠다. 별도의 약을 치지 않으니 그물은 제법 괜찮은 보호망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거둘 때가 일이었다. 순환하지 않는 쓰레기를 줄여 지구와 함께 지속 가능하게 살아가는 법을 찾는 것이 큰 배움인데, 벌레에게 내주지 않기 위해 결국 또 다른 쓰레기가 만들어졌다. 한냉사를 잘 갈무리한다고 해도 흙에 묻었던 곳이 찢기기 쉽고, 구멍이 난 한냉사는 두 번째 해에는 그다지 안전한 보호망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 이후로 학교에서 가을 농사를 지을 때는 조금 늦게 심고, 조금 덜 먹게 되었다.

한냉사 없이, 다른 방제 없이 배추 농사를 지으면 아이들은 신난다. 하루 사이 연두색 배추흰나비 애벌레들이 가득 자라기 시작한다. 속이 차지 않은 망사 잎이 된 배추를 속상해하는 것은 어른들뿐이다. 사실 학교의 배추 농사는 애벌레를 위해 차리는 밥상이다.

애벌레가 먹고 난 배추는 가을 끝 불을 피워 부쳐 먹는 배추전이 되고, 이듬해 노란 배추꽃이 되고, 다시 배추 씨앗이 된다. 나 혼자 모두 먹겠다고 욕심내지 않으니 얻을 수 있는 풍요로움이다. 물론 여름 방학 내 풀밭으로 우거졌던 곳을 갈무리하고 가을 농사를 시작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천천히 힘닿는 만큼 풀을 베어 눕히고 배추 모종을 심고, 상추를 심고, 보리와 밀, 마늘과 양파를 심는다.

가을에 심은 것들은 겨울을 나고 이른 봄 텃밭을 채운다. 1학년 때 심은 마늘과 양파를 2학년이 되어서 수확하고, 요리를 해 먹는다. 늘 먹는 것들이지만 온전히 관계 맺기 힘든 작물들을 만나면 피상적으로 그려오던 '봄에는 새싹 가을에는 열매'로 그려지던 계절이 다르게 채워진다. 겨울을 나야 비로소 여름에 수확하는 작물의 시간, 겨우내 함께 먹기 위해 심고 남긴 것들로 계절을 만난다. 수수 모가지 맹키로 영근 벼들이 어렵사리 태풍을 이겨낼 즈음 논에도 멧돼지가 다녀가고 있다. 한입 가득 훑어 먹고 야금야금 씹어 껍질만 뱉어놓았다.

‘우리 옥수수를 다 먹었어요!’ 하고 화가 났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옥수수와 벼, 배추는 누구의 것일까? 누가 누구의 그것을 빼앗아 갔을까? 속상한 마음을 내려놓고 보면 함께 먹고 사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가을 농사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