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농번기, 농한기

배이슬·전북 진안

2021-12-17     한국농어민신문

[한국농어민신문] 

볍씨를 담그던 날이 까마득하다. 산에 산벚 울긋불긋하면 못자리 할 시기, 들에 조팝나무 나발나발 피면 모내기하는 시기라고 배웠는데 온갖 꽃이 한꺼번에 피었다. 겨우 이때쯤이겠거니 하고 맞춰가던 9년차 초보 농부에게는 기초도 덜 배웠는데 응용문제가 등장한 셈이다.

어렵기는 여든여섯의 자칭타칭 농사 박사 장점이 씨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지금은 일긴 것인데….” 어제는 미루라 하시던 일이 하루 새 서두를 일이 되기도, 영 때를 놓쳐버리기도 한 해였다. 때 이른 서리에 벼도 배추도 속을 태웠지만 거두어 말리고, 수매도 하고, 김장도 했다.

이만하면 ‘한 해 농사 다 지었겠거니’ 싶지만 이제부터 할 일이 있다. 콩을 거뒀으니 가리고 메주를 삶고 띄워 된장 간장을 만들고, 쌀을 거뒀으니 1년 두고 먹을 조청도 고와야 한다. 속을 태우던 고추도 빵궈다 뒀으니 조청 고는 데로 고추장도 담아야 한다.

농사가 나수 잘된 해에는 품이 들어도 나수 담아 놓아두고 잘 묵혀가며 먹어야 덜 든 해에는 조금만 담아 전년도 것으로 해를 넘겨야 하니 할머니 표현대로 규모 있게 둘 것, 먹을 것, 내줄 것을 살뜰하게 챙겨야하고 단지에서 장 한번을 뜨더라도 단지 갈무리도 잘해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그렇게 한 숟가락 크게 퍼먹고 단지입을 닦아야 하는 시기인데 올해는 어찌나 질질 흘려가며 퍼먹었는지 올해 단지는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다.

간혹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만난 이들이 ‘본래는 무슨 일 하세요?’ 라거나 ‘꼭 농사짓는 분처럼 말해요’ 같은 말을 한다. 올 해 특히 1년 농사와 자가육묘, 학교텃밭농사진행부터 진안청년협의체 활동 참여, 진안생태농사공부모임 진작애 운영, 농적 실험을 펼치기로 작당한 지구로온 활동, 풀로 시작하는 슬기로운 지구생활 풀짝풀짝 활동 운영, 겨울부터 차례가 돌아올 여성청년소농 연대 꾸러미 마녀의 계절, 진안생태텃밭전문가 양성과정 기획, 진행까지. 내게는 모두 한 단지에 담긴 귀한 것들이라 어느 것 하나 놓기 어려웠다.

장을 담으며 하나씩 단지 입구자국을 닦아내어 가다 보면 씨앗을 가르고, 한해 농사 작부체계를 계획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금세 씨앗 넣을 때가 된다. 설을 지나면 고추, 가지를 비롯해 씨고구마며 꽃씨들도 심어야 하니 손도 마음도 바빠진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것은 일과 쉼의 경계가 없다. 출근도 퇴근도 없고, 집과 일터의 구분도 없다. 일을 하고 있는데 마음이 편안하고, 쉬고 있으면 불안해진다. 가만가만 씨앗을 갈무리 하다보면 씨앗마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반짝이니 정신을 놓을 수밖에 없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먹고 사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고 그에 따른 일들을 차근차근 일상에서 일궈나간다는 의미다. 겨울을 농한기라고 이야기하지만 매년 더 짙어지는 생각은 농번기와 농한기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논밭에서 선 시간만큼 겨울동안 짓는 농사가 가장 중요하다. 어느 밭에 무엇을 심을지, 어떤 것과 함께 심을지, 거두고 난 후에 무얼 심을지,얼마나 심을지, 씨앗을 받으려면 얼마나 떨어뜨려 놓을지, 씨앗을 일일이 가름하고, 거둬 놓은 것의 양과 상태를 가늠하고 겨울을 나고 있는 작물들을 돌보는 일이 가득하다.

9년째 가장 어려운 농번기는 한겨울이다. 경험이 늘수록 쉬워지는 일이 있는 반면 매년 가을부터 시작되는 다음해 농사와의 만남과 준비는 가장 어렵다. 한해를 돌아보니 ‘매년 급변하는 기후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이 깊어지는 오늘. 농번기도 농한기도 없다. 매일을 오늘의 삶으로서 살아내는 오늘 농사가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