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논’이 계속 ‘논’일수 있다면 좋겠다
배이슬 전북 진안
[한국농어민신문]
때 이른 서릿발에 동동거리며 가을걷이를 하고 있다. 엔간해서는 얼어도 녹았다 다시 얼며 맛이 드는 배추도 여름날 같다가 하루사이로 맞은 되네기(된서리)에 겉잎이 노랗게 얼어 마를 정도였으니 마음이 급했다.
타는 속도 모르고 잘 영근 나락은 고개가 푹 꺾였다. 서둘러 베었어야 할 벼는 서릿발을 맞아가며 몇날 며칠 버텨야 했다. 기계(콤바인)가 있는 집에 일이 밀려 벼를 벨 때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23마지기 논에 해담·설갱·신동진찰 등 여러 가지 벼를 조금씩 심었다. 여러 품종을 심는다는 것은 어느 논에 심을지, 얼마나 심을지, 못자리 볍씨 넣을 때부터도 몇 배로 손이 간다.
벼를 베고 말릴 때는 더 어렵다. 벼농사가 규모화 되면서 농기계는 커졌고, 큰 규모의 농사에 효율적으로 변화되어 왔기 때문에 조금씩 여러 품종을 심고 또 각 품종 당 적은 양을 생산하다보니 가뜩이나 손과 기계가 부족한 수확기에 여러 번 거듭해 수고를 해줄 이를 구하기가 어렵다.
여러 가지 벼를 심고, 조금씩 찧어먹는 것, 논두둑을 높이고 공들여 써레질을 하고, 우렁이의 힘을 빌리기 위해 물을 깊이 대는 것, 논에서 가지고 온 볏짚은 되도록 논으로 돌려주는 것, 한두 해에 걸쳐서는 돌아가면서 논을 쉬게 해주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다.
어찌 보면 번거롭고 비효율적일 수 있지만 이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벼농사 이전에 논농사를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논은 벼를 심기 전부터, 그리고 심고 거두는 과정에서 온갖 생명들의 집이자, 밥상이자, 쉼터인 삶터가 된다.
신비롭게 헤엄치는 풍년새우와 산과 맞닿아 있다 보니 여러 종류의 올챙이들이 논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미 살고 있던 우렁이와 새로 들여 넣어준 논우렁이, 신나서 찾아오시는 토끼와 고라니 백로 멧돼지들까지. 온갖 종류의 곤충과 양서류 조류 동물들이 논에서 함께 살아간다. 그렇기에 논에 벼를 심는다는 건 밥을 배불리 먹겠다는 사람의 욕심 넘어 삶터의 미세기후를 달리 만들고 동물들과 함께 먹고 살아가는 힘이 되는 일이다.
마을에서 살아낸 기억을 가진 볍씨를 직접 기르려니 재작년부터는 유일하게 못자리를 한다. 서로 돌아가며 못자리 해주는 일이 사라지면서 손이 귀해졌다. 그러다보니 어렵사리 친구들과 볍씨를 넣고 키운 벼를 제때 못 베어 잘 영근 나락이 깨지는 꼴을 보며 속이 더 탔다.
제때에 심고 싶은 작물을 심고 거두려면 함께 일할 사람이 많거나 기계를 구입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 큰 빚을 지며 기계를 사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고, 다르게 벌어 농사비용을 감당하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면 논농사를 줄이지 않는 것이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논농사를 놓을 수 없다. 논이 논이 아니게 되는 순간부터 논은 사고파는 다른 무언가로 바꿔야 하는 대상이 된다. 그렇게 논은 벼를 심지 않는 때부터 다른 무언가가 되기는 참 쉽지만 다시 논으로 돌아가기는 참 어렵다.
논이 생명이 가득한 삶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허리 굽혀 돌을 골라내고 둑을 쌓아 올린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과 오랜 시간 여러 생명이 함께 살아온 덕분이다. 논은 우리의 밥을 키우고, 들이쉬는 숨을 키우고, 마시는 물을 키운다. 올해도 어렵사리 지은 논농사. 내년에도 논농사 지을 수 있을까. 논을 지켜 낼 수 있을까. 그 논에 온갖 토종벼와 보리와 밀이 자라는 꿈을 꾸다 깊은 숨을 내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