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2021-10-01     한국농어민신문

[한국농어민신문] 

가장 발길이 많이 닿는 마당 텃밭에서 개성배추, 무릉배추, 청방배추 세 가지 토종 배추가 자라고 있다. 다양한 토종 씨앗 농사를 짓고 있지만, 토종 배추를 심어 보기는 처음이다. 해마다 종묘상에서 배추 모종을 사서 심었는데, 올해는 씨앗에 싹을 틔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대나무에 ‘개성배추’ 이름을 써서 밭두둑에 꽂고, 배추 옆에는 삼십 센티 자를 세웠다. 그리고 옆에서, 위에서, 비스듬히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어떻게 하면 배추의 자람새가 잘 보일까 신중하게 사진 구도를 잡았다. 그때 옆 마을에 사는 친구가 마당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무슨 사진을 그렇게 열심히 찍어?” “아, 배추가 자라는 과정을 일주일마다 찍어서 기록을 남기기로 했거든.”

요즘 전북 진안에서 ‘지구로온’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여러 지역에 사는 친구들이 모여 지속가능한 농업과 삶의 방식을 함께 고민하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렇게 설명을 하니까 거창하게 들리지만, ‘지구로온’은 그냥 좋아하는 자연 곁에서 계속 살아가고 싶은 친구들이 함께 놀고, 일하며 하고 싶은 일을 벌이는 모임이다.

|“흙을 살리는 농사를 짓겠다면서 플라스틱 트레이를 쓰고 버릴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 “맞아. 나도 봄에 씨앗 뿌릴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 아무리 조심해서 써도 결국에는 망가져서 버리게 되니까.” 그렇게 고민을 나누다가 우리는 플라스틱 트레이를 대신할 것을 찾아 다양한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우유곽이나 페트병 같이 쓰고 버려지는 것을 다시 쓰기도 하고, 신문지를 접어 종이 포트를 만들기도 했다. 달걀판을 물에 풀어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보기도 하고, 흙을 반죽해서 소일블럭을 만들기도 했다.

‘소일블럭’은 흙을 벽돌 모양으로 뭉쳐 씨앗을 심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보기 드문 방법이라 외국 사이트를 통해 소일블럭을 만드는 도구를 샀다. 소일블럭에는 물과 밭 흙, 상토와 훈탄, 석회들이 들어간다. 무엇이 더 많이 들어가는지에 따라서 뿌리를 튼튼하게 뻗기도 하고, 시들어 버리기도 했다. 다양한 시도 끝에 식물이 자라기 알맞은 비율을 찾아냈다.

지난봄, 여름 동안 진행했던 여러 실험 가운데 신문지 포트와 소일블럭에서 모종이 가장 잘 자랐다. 쓰레기를 만들어 내지 않고, 모종을 키우는 방법이었다. 배추 모종도 신문지 포트와 소일블럭에 씨앗을 넣어 길렀다.

가을에는 합천, 진안, 완주에 사는 친구 세 명이 저마다 자기 밭에서 개성배추, 무릉배추, 청방배추를 심고, 자라는 과정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씨앗을 심어 모종을 기르고, 밭에서 키워 밥상에 차려 먹고, 다음해 봄, 다시 씨앗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말이다.

지금 지구에서는 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 씨앗도 마찬가지다. 소비자가 많이 찾고, 수확량이 많은 품종만 생산되면서부터 지역 환경에 적응했던 엄청나게 많은 씨앗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플라스틱을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씨앗을 지키는 일은 지속 가능한 삶에 다가서는 일이다. ‘지속 가능’과 ‘다양성’은 어찌 보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생명이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은 스스로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힘을 가진다. 식물의 뿌리와 살아 있는 흙은 이미 배출된 탄소까지 땅속에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기후위기시대에 이보다 더 나은 대책이 있을까?

씨앗을 지키는 일은 농부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세 가지 배추를 심고, 씨앗을 뿌리고, 받기까지의 과정을 나누기로 말이다. 기후위기가 우리 모두의 일이듯이 씨앗과 생물종 다양성을 지키는 일도 지구에서 삶을 이어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씨앗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에게도 이 이야기가 닿을 수 있길 바란다. 혼자 끙끙 안고 있던 고민을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 고마운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