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24일은 정부의 주역들이 우리 국민경제와 농업에 또 하나의 획을 그은 역사적인 날이다. 어떤 획을 그었는가? 다자간 협상인 UR과 달리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은 우리 정부가 일부 기업의 공산품 수출을 늘리기 위해 농업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비인도적인 획을 그었다.○농업 희생 담보, 국제무역 합의이것은 단순히 FTA 하나를 체결했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농업이 희생될 줄 알면서도 한 정부가 전세계의 석학들과 각국의 정부가 인정하는 농업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국제무역을 하겠다는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의사결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수많은 FTA가 농업에 대한 경계심없이 추진될 뿐만 아니라 진행중에 있는 WTO DDA 농업협상 또한 고삐가 풀어질 것이 눈앞에 선하다. 이에 관한 선진 각국의 주요 정책사례와 한·칠레 FTA가 가져올 영향을 고려한다면 이 정부의 존재가치가 의심스럽다. 농업이 타산업과 다른 중요한 특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일본은 최초의 FTA를 농업과는 무관한 싱가폴과 체결했다. 그리고 미국은 불과 몇 달전에 세계 각국의 신랄한 비판을 무릎쓰고 농업개방에 따른 농가경제 안정을 위해 농업보조금을 획기적으로 높일 것을 제도화시켰다. 또한, 세계 농산물교역질서를 미국과 더불어 사실상 주도해가는 EU는 2차대전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공동농업정책(CAP)을 통해 그들 예산의 9할가량을 농업예산으로 사용했기에 세계 최대의 농산물 수입국에서 오늘과 같은 농업강국으로 변신했다.○농업 특수성 고려한 정책 집행을우리 정부와 주변 지식인들은 이러한 선진국들의 통상정책과 농업정책의 교훈을 외면한 채 입만 벌리면 앵무새처럼 무역자유화가 대세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경제정책의 한 축을 수출입국에 두고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무역자유화 정책의 필요성을 외면할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개방을 하되 지금까지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개방의 한계와 선진국들의 정책행태를 교훈삼아 최소한 농업의 특수성만은 인정할 줄 아는 현명한 (경제)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점이다.세계적 수준의 분석방법으로 아무리 계산해봐도 이 한·칠레 협정은 국민경제적 실익이 없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의 농산품 수출국을 첫 번째 자유무역협정 상대국으로 선택하여 우리농업을 희생시키고 상대적 박탈감으로 허덕이는 농민들의 절규를 외면하는 이유를 정부와 침묵하고 있는 이 땅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설명하겠다는 것인가? 이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은 국회의 비준절차를 남겨놓고 있으며, 국회의 비준을 거친다면 협상피해보상을 위한 특별법제정과 같은 별 의미가 없는 일들이 남아있다.행정부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무분별한 행위를 할 경우 국회가 이것을 견제할 수 있는 기능을 하도록 장치를 한 것이 민주국가의 삼권분립이다. 지금 이 땅의 선량한 400만 농민들은 이 국회의 기능을 얼마나 신뢰하며 어떤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는지….○잘못된 정책 국회가 견제해야어쨌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은 타결되었고 현 정부와 농정당국, 그리고 집권당의 의지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이제 믿을 것은 직접적인 피해당사자인 농민들의 현명한 자구책과 간접적 피해자인 전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의 견제기능이 있을 따름이다. 결국 이 협상타결은 국민경제의 안정장치인 농업과 400만 농민의 생존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일부 기업의 이익을 옹호하는 한국정부의 구조적 치부를 드러낸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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