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지나고 정월 대보름으로 치닫고 있는 요즘 농촌인심이 그리 넉넉지 못하다. 다른 때 같으면 들녘 곳곳마다 1년 농사준비에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마을마다 대보름 잔치라도 준비할 테지만 농촌은 그런 활기를 잃은 지 오래다. 이 모든 것이 지난 가을 유례 없는 쌀값 하락으로 농촌인심이 차갑게 식어버린 탓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현상을 ‘대풍후유증’(?)이라고 투덜거린다.쌀이 남아도는 시대에 농부에게 풍년이란 말이 더 이상 축하 받을 일도 자랑거리도 못되는 세태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가을의 사태가 농민들에겐 억울할 뿐이고 지금도 모든 탓을 생산과잉으로만 돌리는 정부와 언론들의 야박한 태도가 밉기만 하다. 농민들은 정부의 시책에 따라 쌀 증산운동에 열성적으로 동참했을 뿐인데 그로 인한 보답으로 남아도는 쌀을 책임지라는 짐만 떠맡고 말았다.하지만 쌀값하락이 부지런히 농사지은 농민들 탓으로만 돌릴 수 있는 문젠가? 쌀값이 떨어지는 데는 몇 년째 급감하고 있는 쌀소비 하락도 한몫을 했고 그런 의미에서 도시 소비자들의 식습관 변화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쌀값 대폭락을 계기로 도시와 농촌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생겼다.4인 가족이 요즘 유행하는 서양식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 한끼를 먹었다고 치자. 족히 10만원은 넘을 것이다. 그 돈이면 쌀을 몇 kg을 살수 있는지 소비자들은 뻔히 알면서도 쌀 값이 비싸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서양음식들에 비해 쌀값이 얼마나 싼가를 비교할 줄 모른다. 쌀값이 오르는 동안 공산품 물가, 소비자 물가, 공과금 등은 또 얼마나 올랐는가?또 쌀은 떨어지면 농부들에게 손을 내밀어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햄버거나 빵에 길들여진 도시민들이 쌀 없는 세상에서 손을 내밀면 밀가루나 제대로 던져 준다고 생각하는 건지,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이런 말을 하면 도시 사람들은 ‘내 돈 갖고 내 맘대로 쓰는데 뭐가 문제냐’고 하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농촌보다 조금 나은 환경에서 산다고 해서 농민들을 무시하고 농업을 천시한다면 농도불이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 농촌이 살아야만 도시도 살 수 있는 것이다. 우선 먹기 좋다고 곶감만 빼어 먹다보면 뒷감당은 어찌 한단 말인가? 우리 농민들이 도시민에게 멸시받던 울분을 견디지 못해 쌀 한 톨도 내주지 않겠다고 딴마음 먹는다고 생각해보자. 아무리 많은 돈을 갖고 있어도 쌀을 살 수 있을까? 한 해만 농사짓지 않고 자급자족할 만큼만 쌀을 생산해 낸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1차 산업인 농업이 살아야 나라가 유지될 수 있다. 농업은 나무의 뿌리와도 같고 도시는 그 위에 피는 줄기요, 꽃이다. 제 아무리 가지가 튼튼해도 뿌리가 흔들리면 말라죽고 꽃도 피우지 못한다. 쌀값이 폭락한 것을 계기로 이제 도시민들은 농업과 농민들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할 때다.이정희 개미농장 공동대표- 전남 해남군 화산면 경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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