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가 저물어간다. 2010년은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는 치욕을 겪은 경술국치 100년, 광복 65주년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민족의 문제, 국가주권, 민주주의, 국민생활 측면에서 좀 더 떳떳한 마무리를 했으면 한다. 

그러나 한 해를 돌아보면 현실은 기대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 같다. 무엇하나 나아진 게 없고 민초들의 삶은 신산스럽기만 한데, 봄에는 우리에게 ‘무소유’를 가르친 법정스님이, 연말에는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이 세상을 뜨는 등 큰 어른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매년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해온 ‘교수신문’이 대학교수 등 지식인 2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41%가 ‘머리는 숨겼지만 꼬리는 숨기지 못하고 드러낸 모습’을 가리키는 장두노미(藏頭露尾)를 꼽았다. 장두노미는 진실을 숨겨두려고 하지만 거짓의 실마리는 이미 드러나 있다는 의미다.  

올해에는 천안함 침몰, 민간인 불법사찰, 영포게이트, 한미 FTA 졸속협상, 예산안 날치기 처리 등 수많은 사건이 터졌고, 일이 불거질 때마다 정부는 진실을 공개하고 의혹을 해명하기는 커녕, 오히려 진실을 덮고 감추기에 급급했다. 진실을 밝히려는 국민이 기소되거나 공안사범으로 몰리는 행태가 일상화됐고, 국가를 감시해야 할 주권자가 오히려 국가로부터 감시를 받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오늘 한국의 정치는 갈릴레이가 살던 중세 암흑의 시대로 후퇴했다고도 한다. 암흑의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자 이단으로 처단 받고, 거짓과 음모, 그리고 감시와 처벌이 횡행했다. 하지만 17세기 갈릴레이가 교회의 탄압 속에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던 것처럼 진실은 영원히 덮어둘 수가 없다.

교수사회는 사자성어를 선정하면서 올해 의미 있는 실천을 한 인물로 고 리영희 선생을 꼽았다. 평생을 한결 같이 진실만을 추구하며 살아간 리영희 선생이 선정된 것은 이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교수들이 얼마나 진실에 대해 목말라 하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프랑스에 ‘에밀 졸라’가 있고 중국에 ‘루신(노신)’이 있다면 우리에게 리영희 선생이 있다. 1974년에 펴낸 그의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는 유신독재 하에서 금서가 됐지만 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 넓게 퍼져 87년 민주화 대투쟁의 주역들을 만들어냈다. 리영희 선생은 여기서 베트남전에 개입하기 위한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와 그 사실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자세를 소개하면서 진실을 대하는 지식인의 전범을 제시했다.

리영희 선생은 또 다른 저서 ‘우상과 이성’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댓가를 요구하는 일인지 깨우쳤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이는 기자라면 마음속에 반드시 새겨야 할 금언이다.

지금은 암흑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진실을 밝히는 일은 어려운 길이다. 허나 우상과 싸우는 일이 고통을 수반한다 하더라도 진실은 반드시 빛을 발한다는게 역사의 진리다. 우리들 속에는 또 다른 리영희가 꿈틀대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진보한다. /편집부 부국장.
이상길leesg@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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