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잠에서 깨어 호도, 잣, 땅콩 등의 부럼을 깨어 물고 덕담을 건넨다.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나오니 휘영청 밝은 달이 며칠째, 미처 몸을 숨기지 못한 채 저편 산으로 긴 꼬리마저 감추려는 듯 기울어져 있다.이 시각이면 항상 어둠이 낮게 내려 앉아 차갑게만 느껴졌는데 이렇듯 밝으니 왠지 포근한 느낌마저 든다. 멀리서 쇠죽을 쑤는 농부의 손길이 분주하기만 한 듯 마을 굴뚝에서 연신 뽀얗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침을 기다리는 누런 암소는 송아지와 함께 늦잠 자는 이를 깨우듯 음매 거리며 울어댄다. 숨쉴 때마다 아직은 온기가 남아있는 입김이 굴뚝의 연기처럼 베어 나오는 가운데 더딘 일손을 자꾸 재촉하게 된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나서 이맘때쯤이면 한번씩 겪어야 하는 행사인 보름맞이를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해서 겨우내 처마 밑에 걸어두었던 시래기를 내리고 지난해 장만해 두었던 고사리며 취나물, 호박고지, 토란대 등 갖가지 나물들을 꺼내어 삶아 놓아둔 걸로 조미를 끝내놓으면 대보름맞이 준비가 시작된다. 쌀을 씻어 뽀얗게 우러나온 쌀뜨물에 된장을 풀어 삶아놓은 시래기와 콩나물, 무를 얇게 저며 넣고 오래도록 은근히 끓여놓은 된장국과 대강 구색에 맞춘 아홉 가지 나물과 다섯 가지 곡식과 밤, 대추, 은행 등을 섞어 까아만 시루에 앉혀 가마솥에 얹어 놓으면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오곡밥이 마련된다. 때마침 이웃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하고 빙 둘러 않아 나누어 먹는 점심은 무척이나 별미다. 뜨거운 차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제비뽑기를 시작으로 멍석위에 네가락의 윷이 던져지고, 또 한켠에서는 아낙네들이 즐길 수 있는 투호도 마련돼 있다. 모두들 흥겹고 열심히 들이다. 여러 가지 놀이를 준비해 골고루 상품이 나누어지도록 배려를 했어도 꼭 그렇지 만은 않은가 보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참가상을 보태어 즐거움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보름맞이가 되도록 했다. 고단함을 덜어주는 하루를 흥겹게 마치고 나서 뒷마무리까지 마치면 어느새 인가 둥그런 달이 조금씩 얼굴을 내어 미는가 싶더니 그 밝기가 더해만 간다. 왁자지껄 밥을 얻는다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는 동네 아이들에게 따로 마련해 놓았던 따듯한 오곡밥과 나물을 챙겨주며 아울러 건강 하라는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정말이지 밝은 달이다. 한참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가슴에 와 닿을 것 같은 그래서 마음까지 비취질 것 같은 그런 달님이다. 크고 작은 재해들로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던 우리네 농부들에게 새로운 빛을 내려주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가져다주는 따듯함과 풍성함을 얻게 해 달라고 빌어본다. 박상애 (38세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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