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동안 집을 비웠던 탓인지 방안이 무척 어색하고 썰렁하다는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했다.수능 점수가 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며칠동안이나 우울해 하더니 이제는 가야 할 학교를 놓고 고심을 한다. 농촌 살림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인지라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학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국립대학만 선택하자니 가야 할 학교가 마땅치 않다.대학입시 안내문을 방안 가득히 펼쳐놓고 나름대로 연구를 해보지만, 우리 아이가 갈 수 있는 국립대는 겨우 서너곳. 그곳도 안정권은 아니니 아이의 가슴과 내 가슴이 안타까움으로 함께 저려온다.또한 내년에 고등학교를 가야하는 둘째도 이곳 시골학교보다는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길 원하지만, 하숙을 시켜야 하는데, 경제적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니 이 또한 낭패가 아닐 수 없다.농촌살림을 시작한지도 어느새 15년. 아이들 데리고 농촌에 다시 돌아올 때는 꿈도 컸었다.뿌린대로 거두어 준다는 땅이 있고, 남편의 성실함과 가족 모두의 건강이 있으니, 성실히 일하면 도시의 월급쟁이보다는 나으리라는 생각으로 밭이랑을 헤치고 다니며 열심히 일했는데, 아이들이 훌쩍 커버린 뒤안길에서 돌아보니 보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애들 가고 싶어하는 학교도 제대로 못 보내는 무능한 부모가 되어 있을 뿐이다. 게다가 벌어서 모아둔 돈은 고사하고 연말이면 쏟아지는 원금과 이자 독촉장이나 받아들고 한숨이나 짓고 있는 모습이 돼있으니, 이 얼마나 초라하고 한심한 노릇인가.애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는 돈걱정 안하고 실력대로 원하는 학교에 보내리라, 그동안 우리 부부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경제력이 허락 질 않아 애들이 원하는 학교에 보내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니 지금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다.가정 형편 때문에 사립학교에 갈 수 없어 선택의 폭이 좁아진 딸아이, 하숙비가 부담돼 원하는 고등학교에 못 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농촌 정말 이대로 둔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사회의 어느 구성원들보다도 더 열심히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돌아오는 대가라고는 한해 한해 늘어만 가는 빚뿐이니 말이다.오늘도 남편은 부채경감을 위한 집회에 갔다가 추위와 울분에 겨워서 한 잔 했음인지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와 누워있다.이렇게 추운 날 농민들이 왜 농기계를 몰고 거리로 나가야 한단 말인가.물론 농업경영을 제대로 못한 우리에게도 책임은 있겠지만, 촌부로서 바라건데 농산물 가격이라도 보장된다면 이렇게까지는 가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모든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 유독 농산물 가격만은 하락하고 있으니, 이게 어찌 우리 농민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이출남 농민후계자 -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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