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익어간다.알알이 영글어 가는 벼들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모진 태풍과 비바람을 용케 잘 견뎌낸 강인함은 또 다른 내일을 약속하는 것 같다. 밤새 무겁게 내린 이슬을 털며 이른 아침을 열면 뜨거운 태양이 먼저 마중을 나와 온 몸을 달구어 내는데도 벼들은 말없이 토실토실 살찌우는 가을.추수를 앞둔 요즘은 벼가 익기만 기다릴 뿐 논에서 하는 일이 많지 않다. 그러나 내 남자는 벼가 익어가는 모습이 마냥 좋아 아침저녁으로 논을 돌아보고 온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과 허둥대느라 아침이 더욱 바빠진 하루였다. “어이! 오늘 논에 가서 자운영 꽃씨 좀 뿌리세!”녹비작물로 면사무소에서 자운영 꽃씨를 주었는데 내 남자는 그것을 뿌리겠다고 비료살포기를 짊어지고 논으로 들어갔다. 비료살포기에 비닐 호스를 매달고 끝은 이웃집 아저씨가 붙잡고 흔들었다. 뱀처럼 길게 늘어진 비닐 호스를 타고 꽃씨가 춤을 추며 벼 포기 사이로 내려앉았다. 남들은 도복된 곳에 벼멸구가 극심하다고 농약(분제)을 하느라 하얀 가루를 풀풀 날리고 있는데 우리는 목초액을 쓴 탓인지 쓰러질 듯 넘어질 듯 출렁이고만 있다. 분제를 할 때는 하얀 지네가 나락 위에서 꿈틀꿈틀 뒹굴 듯이 사정없이 흔들어 대야만 약제가 고루 살포된다. 이웃집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저 주황색 호스 끝을 잡고 내 남자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자운영 꽃씨를 뿌리고 있었을 것이다. 두분이 땀을 뻘뻘 흘리며 논둑으로 나왔을 때 25kg의 꽃씨 자루를 어깨에 메고 달려갔다. 비료살포기 뚜껑을 열고 꽃씨를 부어 주고 다시 농로로 나왔다. 다른 논으로 이동하려면 서툰 솜씨지만 경운기를 끌고 가야하기 때문에 서둘러 경운기를 몰았다. 저 멀리 어머니 머리를 닮은 눈부신 억새풀이 쉬엄쉬엄하라고 손짓한다.환경을 생각하는 농업을 하자. 친환경 농업을 해야만 우리가 살 수 있다. 농약을 많이 쓰면 땅이 산성화되어 결국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눈 앞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몇 년전 내 남자는 농약중독에 걸려 농약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아프다고 할 정도로 고생을 한 적이 있다. 할 수 없이 내가 농약방제를 하고 내 남자가 호스를 잡아 당겨보았다. 줄 잡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우거진 벼숲을 헤쳐 나가면서 농약을 살포한다는 것은 숨이 턱턱 막히는 고된 작업이었다. 그 후 우리 부부는 농약을 쓰되 농약값이 다소 비싸더라도 약효가 지속되는 것을 선택하여 농약회수를 줄여가고 있다. 농약살포시 목초액을 혼합하여 쓰면 농약냄새도 사라지고 벼의 도복 방지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천하게 되었다. 화학비료 대신 논바닥에 퇴비를 살포한 결과 터질 듯한 가슴을 하고서도 쓰러지지 않은 벼 알갱이를 선물받게 되었다.내년 봄바람이 살랑대는 개미농장 들녘에는 연보라빛 자운영꽃이 함박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한국농어민신문webmaster@agrinet.co.kr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