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던 날부터 내리던 비 때문에 세워놓은 참깨 조파리에서 파란 싹이 조르르하다.그들을 뒤집어서 다시 묶어 세워놓고 논에 다다르니 아니나 다를까 네 논 내 논 할 것 없이 질펀하니 누워버린 들은 답답하기만 한데 논두렁 쳐진 곳으로 내리는 물소리만 요란하다.아침에 곯아버린 고추 서너멍석 내다 버리면서도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다잡았던 마음이 그만 골을 내려한다.늦태풍, 긴장마에 밀려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제일 서두를게 김장무우, 배추를 심는 일이다. 아침에 로터리 쳐둔 밭의 흙은 질기기가 한이 없다. 맨발로 뛰어다니기에도 미끄러운 밭에 배추모를 내다가 잠깐 하늘을 보니 하늘은 어쩜 그리 천연덕스러운지…어느 보석이 하늘색깔만 할까? 새털구름은 하늘을 비껴서서 가장자리를 수놓고서 산들산들 바람까지 불어와 정말로 아름다운 가을풍경이다. 볼수록 눈부신 하늘을 혼자 보기엔 아까웁단 생각이 든다.며칠전에 다녀갔던 조카(막내시동생 아들) 얼굴이 떠오른다. 시동생 내외는 아이에게 황토흙 밟혀보려고 왔다고 했는데, 그날은 비가 특히 많이 와 그냥 돌아갔었다. 지금 김장 심느라 맨발로 뛰어 다니는 내 옆에 그 아이를 놔뒀더라면 얼마나 재미있어 할까, 상상만 해도 즐겁다.나는 내 아이들을 흙속에서 키웠다. 흙에 주저앉아 장난하다 졸리면 자고, 요즘처럼 흙이 건강에 좋고 나쁘고의 개념을 떠나, 흙은 우리집 생활이었기에 그리 살았었고, 저녁에 아이들을 씻기다보면 머리카락 속이나 귓구멍에서 흙이 나오곤 하여 언제 한 번 아이들을 흙을 밟히지 않고 살아보나, 하는게 나의 소원이었다.그 시절 나의 소원과 일부러 흙을 밟혀보이겠다는 지금 동서의 소원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흙을 잊지 않고 있는 시동생 내외의 마음이 예쁠 뿐이다.꽃삽 하나로 세계를 제패하듯이 신나게 놀리던 손도 해가 이을때쯤 일이 끝나가니 무디어만 진다.내일 할 일을 찾아 머리속을 뒤지다 보니 아아! 추석이 목전에 닿았다. 이불빨래도 해야지, 김치도 담가야지, 송편 속은 무어로 하지? 예전에는 김장을 솎아 김치를 담그곤 했는데, 장마로 인해 늦어진 김장파종과 또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온 추석이어서 아직은 멀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그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은 비가 오든 안오든 남편은 하다만 벌초를 하러 산으로 가야겠고, 나는 김치부터 담그고 나서 다른 일을 해야할 것 같다.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그 새 추석이라니… 그리고 이렇게나 아름다운 하늘과 화사한 날씨를 맘편히 즐기지도 못하는 채 동동거려야 하니, 그래서 동동팔월 이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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