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년을 살아도 변함없는 지리산처럼

한국농어민신문 창간 30주년을 맞아 18일 한반도의 가장 큰 국토 줄기를 형성하는 백두대간의 큰 산, 지리산을 담았다. 한국 특산종이며 지리산을 원산지로 하는 구상나무 숲 너머 장대하게 펼쳐진 지리산의 새벽 능선들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한없는 포용력으로 산 아래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전해 주는 듯하다. 4월 18일, 새벽 6시24분, 지리산 제석봉(1808m)구상나무 숲 너머 바라본 지리산의 남부능선 모습. Canon EOS1D MK4. Canon Lens 16~30L. 셔터 1/30, 조리개 11. 김흥진 기자.

4월의 산맥이 산하를 달립니다. 지리산 제석봉 구상나무 군락 너머로 남부능선이 첩첩이 이어집니다. 수난과 질곡의 역사 수 만년을 살아도 변함없는 지리산은 우리에게 늘 성찰과 저항의 상징으로 유구하게 존재합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이제 30년이 흘렀습니다. 한국농어민신문이 1980년 ‘주간 농산물유통정보’로 첫 고고성을 울린 이래 10년도 세 번이나 지났습니다. 한국농어민신문은  30년 동안 변화하는 시대를 지켜보고, 고발하고, 선도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한국농어민신문은 농어민을 대변하는 농어업 정론지라는 원칙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지켜왔습니다.   

80년 그 때는 희망과 암울함이 교차하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이른바 ‘서울의 봄’과 ‘5월 광주 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가 등장하고, 수출 입국을 가속화하기 위한 개방농정으로 대량의 농산물이 수입돼 농가부채가 쌓여갔습니다. 2차 오일쇼크로 경제가 뒷걸음질치는 가운데 사상 초유의 냉해로 벼농사가 망가져 외국에서 세 곱절이나 비싼 수입쌀을 들여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농촌인구가 1000만이 넘었습니다. 팍팍한 농촌생활을 견디지 못해 정든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가는 가족이 늘어만 갔지만, 한편에서는 이 땅에서 농사짓고 살아가고자 희망을 일구는 농민도 적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소를 대신할 경운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됐고, 채소 등 원예작물을 증산하기 위한 하우스 농업, 백색혁명의 시대에 이어 최근에는 식물공장이 모색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흙바닥과 아궁이와 연탄, 공동빨래터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입식부엌과 가스, 싱크대, 세탁기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영농과 생활에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하고 하우스 일을 나가도 휴대 전화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계속되는 개방농정, 심화되는 도농격차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젊은 농군이 떠난 마을에는 노인들만이 남아 있고, 농촌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그친지 오래입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결혼이주여성과 외국인 노동자가 채우고 있습니다.       

한국농어민신문은 격동의 30년 세월을 농민과 함께했습니다. 소 값 파동, 농협민주화의 현장에 있었고, UR(우루과이라운드) 및 WTO(세계무역기구) 반대투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 국난극복에 함께 했고, 지방자치의 발전을 선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농촌은 어렵고, 앞으로도 어두운 터널의 출구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개방농정과 농어민 홀대는 여전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 인류의 불행이 시작됐지만, 상자에는 오직 하나 희망이 남아 있다 합니다. 우리 농어업과 농어촌, 농어민에 희망의 등불을 밝히는 존재를 자처하면서, 한국농어민신문 30년, 한국농업 30년을 지면에 담았습니다.
이상길leesg@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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