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댁의 건강밥상

가을 지나기가 조금 힘들었다. 여름 가뭄으로 몸살을 앓던 콩이며 팥을 거두니 비가 줄곧 내렸다. 앞밭에서 말리던 서리태와 수수, 팥에 방수포를 있는 대로 씌어놓고는 또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렇잖아도 수확이 엉망인데, 썩기라도 하면 큰 일이었다.

몸도 마음도 물 먹은 솜 같던 날, 볼일이 있어 면사무소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밭에서 마을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인사를 건네자 젊은 주인이 술 한 잔 하고 가시라고 소리쳤다. 천궁 수확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고랭지 배추 작황이 썩 좋지 않아 애가 탔는데, 천궁은 훨씬 낫다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아래쪽에서 천궁을 캐던 농군의 아내가 올라왔다. 얼굴이 부어있었다. 종일 엎드려서 일한 탓이리라. 그래도 그이는 밝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오가는 이들에게 술 한 잔씩 대접해야 내년 농사도 잘 된다며 바구니를 가리켰다.

주인 내외는 다시 밭으로 내려가고 나는 술상을 보기 시작했다. 바구니 안을 살피니 양미리 한 두름이 있었다. 어느새 양미리가 나왔네. 그러고 보니 장을 본 것이 언제였더라. 휴대용 버너에 프라이팬을 달구고 노란 비닐 끈에 엮인 양미리를 한 마리씩 빼서 팬에 올렸다. 야전이니 기름이 있을 리 없었다. 치~ 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났다. 젓가락도 보이지 않아 손가락으로 뜨거운 양미리를 뒤집었다. 앗 뜨거! 하고 손가락을 입으로 호호 부니, 고소함이 향기처럼 퍼졌다.

그 저녁, 우리들은 오솔길에 쪼그리고 앉아 양미리를 안주로 댓병 소주를 비우며 풍년을 기원했다. 집에 돌아오자, 거나하게 취한 남편이 옛 이야기를 꺼냈다. 30년도 더 전의 백수 시절, 종묘 뒷골목에 선술집이 있었단다. 천 원을 내면 막걸리 두 주전자에 연탄불에 구운 양미리 한 접시가 나오는 곳. 이상은 높고 현실은 저 아래였던 젊은이들은 이 집에 들어설 때면 호기를 부렸단다. “여기, 천만 냥짜리 양미리 한 접시!” 천만 냥짜리 양미리는 알이 꽉 찬, 알배기 양미리를 뜻했단다. 그렇지만 자리가 파할 즈음이면 젊은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단다. 그러면 당시 열애 중이었던 친구가 공중전화로 달려가고. 얼마쯤 시간이 흐르면, 서둘러 오느라 얼굴이 빨개진 예쁜 처자가 돼지저금통에서 꺼낸,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 두어 장을 들고 왔단다. 세월은 화살과 같아, 사랑에 빠졌던 그 젊은 연인들은 그때 자신들의 나이와 같은 아들을 두고 있다.

양성댁 강분석
앙성댁 강분석(52)씨는 1997년 봄 서울에서 충북 충주시 양성면으로 귀농, 지금은 경북 봉화로 이사해 귀농 12년차를 맞고 있다.
한국농어민신문webmaster@agrinet.co.kr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