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이 잘 사는 나라…제 영원한 숙제죠”

우리나라 농업문제 연구 내지 농민운동, 사회운동의 산 증인을 꼽으라면 이우재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사장을 빼 놓을 수 없다. 그와 농업문제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한국의 현대사 사건과 인물들이 굴비꾸러미처럼 역사 밖으로 나온다. 50년대말 주석균 선생의 농업문제연구회에서부터 시작해 크리스찬 아카데미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민중당을 만든 뒤 여·야를 오가며 두 번의 국회의원과 한국마사회장을 지내면서도 ‘농민이 잘 사는 나라’는 그의 영원한 과제다.

서울 떠나 고향 예산에 터 잡고 시골살이

지난 14일 그를 서울 금천구 자택 근처에서 만났다. ‘요즘 어디 주로 계시느냐’고 물으니 “나요? 대한민국 중부권에 살아요”라고 웃는다. 예산에서 서울까지 수시로 다니다 보니 그렇다는 말이다. “시골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라 아파트에서 죽는 삶, 비생산적이고 시간낭비적인 서울살이 떠나서 씨 뿌려 한포기 농사 짓는 게 더 의미 있지요. 농촌이 가지고 있는 가치, 향토문화와 정신을 계승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산을 중심으로 했던 보부상을 되살리는 일도 하고 있죠.” 더 이상 정치는 관여하지 않지만, 두 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경력으로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남정 주석균 선생(1903~1981)이 만든 농업문제연구회 얘기를 들어봤다. “주석균 선생이 자유당 때 만드셨어요. 농림부 차관까지 지내신 우리나라 농업경제학의 선구자이지요. 주석균, 박근창, 김병태, 박현채, 유인호, 이건우, 김낙중 선생이 있었고, 저는 대학 3학년 때 막내로 참여했지요. 그 때 운영은 김병태 선생이 하셨죠.”

농업문제연구회는 현대사의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타격을 받기도 했으며, 이후 김서정, 양정규, 이우재, 황민영, 임동규 등 실천가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근대화연구회’가 태동된다. “그 때부터 사회구성체 논쟁을 참 징그럽게 많이 했지요. 아무튼 농업근대화연구회는 당시 유일한 민간 사단법인 연구소로서 많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비슷한 연배의 우리나라 운동가들은 거의 농업근대화연구회 출신이죠.”

농어촌사회연구소, ‘농업근대화연구회’가 모태

농업근대화연구회는 79년 유신말기 격변기까지 운영됐고, 85년 이우재, 황민영, 장상환, 박진도, 허헌중에 의해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로 다시 태어난다.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는 8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사회 민주화, 농협 민주화, 지방농정, 친환경농업, 생협운동을 주도해 오고 있다. 이우재 이사장은 그 과정에서 한국농민운동사 연구, 한국농민운동사 등을 집필하기도 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이우재 이사장을 비롯한 사회운동가들은 강원룡 목사의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통해 활동하다가 줄줄이 투옥된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그 때 간사중 한 명으로 노래도 가르치고 했는데, 가장 먼저 잡혀 갔었지요”(웃음)

그는 현실정치에서 90년대에 이재오, 장기표, 김문수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하고 상임 대표를 맡았다가 민자당으로 국회에 들어가 한나라당에 있었으나 2003년 이부영 등 5명과 한나라당을 탈당, 열린우리당으로 옮기는 등 곡절을 겪었다. ‘진보세력으로서 민자당, 한나라당에서 뜻을 펴는 게 가능했느냐’고 묻자 “당시 제도정치권에서는 안됐다. 고목 같은 보수집단에서 재주는 곰이 부리고…개혁한다고 들러리 세우고, 결과는 다른 세력이 가져갔다”고 답한다.

친환경농사 지으며 지역사회 활성화 모색 중

그는 요즘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는 지적에 대해 “한발씩 다지면서 나갔다면 이렇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역시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이 정권이 무리수를 둘수록 다시 개혁의 시대가 온다”고 말했다.

농민운동의 원로인 그다. 말을 아끼면서 어렵게 고민을 얘기한다. “초창기에 내가 주장하던경제개발을 위한 저노임, 저 농산물 가격, 수입농산물, 정책 수탈, 이 명제가 아직 그대로 입니다. 이제는 국민들이 납득하는 내용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농업회의소도 만들고요.”

한국의 그룬트비를 꿈꾸는 그다. “농촌운동을 위해” 예산농고를 나와 일부러 서울대 농대 수의학과를 가서 4.19 때 학생회장도 지냈다. “바뻐. 좀 쉬려고 했는데, 그렇게 잘 안돼.” 어린 아이처럼 웃는 그에게서 74세의 나이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 고향인 충남 예산에 터를 잡고 친환경 농사를 지으며 윤봉길 의사가 만든 월진회(月進會) 회장을 맡아 윤봉길 의사의 이상을 구현하고 농촌 지역사회를 활성화 하는 일에 빠져 있다.
이상길leesg@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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