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 농촌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게 꿈”

오재길 선생은 1976년에 정농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맡은 이래 우리나라 유기농업을 이끌어온 산 증인이다. 현재는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가 ‘(재)제주생명농업’ 농장에서 새로운 생명의 터전을 젊은이들과 일구는 중이다. 14일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가 서울 정독도서관에서 주최한 ‘유기농업운동사연구모임’에서 ‘오재길 선생의 유기농업운동사’를 주제로 강연한 그를 만나보았다.

“사람의 생업 중 가장 선한 것이 농업”

오 회장은 제주 관내 추자면 출신(1920년생)이다. 평안남도 약종상 시험에 붙어 약업계로 진출했다가 일제의 징용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간 뒤 일본 패전을 내다보고 귀국했다. 1953년 성경을 배우다가 “사람의 생업 중에 가장 선한 것은 농업”이라는 함석헌 선생의 강연을 듣고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했다.

“영농자본이 없어 여러 해 서울에서 허송하다 4.19 학생혁명 과정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지켜봤어요, 그 때 새 역사의 장이 열리는 듯 보여 더 지체하지 말자는 결심이 섰고, 61년 새 봄을 맞이 하면서 동두천읍 벌판에 약간의 농토를 구입해 농민으로서 삶을 시작했습니다.”

증산 강조하던 1970년대, 유기농업 시작

풀무농장 연수회에 강사로 왔던 일본 애농회의 ‘고다니 주니치’로부터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는 관행농법의 문제점에 대해 듣고 나서 1976년 1월 원경선 선생 등과 함께 정농회(正農會)를 조직하고 14년 동안 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76년 당시 농정은 식량증산에 열을 올리던 시절이니 정농회는 냉대를 받았다. “증산은 뒷전으로 바른 농사를 짓자는 목표였으니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정보담당들이 아침, 저녁으로 찾아올 정도였다. 초대 회장인 그는 기술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양(아산) 강태봉 안식교 목사 농장, 구례 고재익 선생 농장을 방문해 선각자적인 기술을 공부하기도 하고 일본, 미국, 캐나다, 스위스, 독일, 쿠바 등지에 가서 견문을 넓히기도 했다.

그는 93년 김영삼 정부가 등장하면서 농민단체들에게 건의사항을 서면 제출하라고 하자 “전 농토에 제초제 살포를 금지시키고 학생들과 가정주부를 동원해서 제초작업을 하자”는 건의서를 내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아흔의 나이, 평화의 섬 제주에서 꿈 펼치다

그는 김대중 정부 때인 98년 11월11일 농민의 날에 ‘대한민국 유기농업원년’을 선포한 일을 큰 보람으로 기억한다. 당시 농림부 장관은 김성훈 중앙대 명예교수. “국무총리도 앉아 있었는데 나는 맨 앞줄에서 현장을 지켜보면서 감개무량했다”는 것이다.

그가 평생 유기농업 운동에 몸 담고 있으면서 가져온 희망은 자신의 손으로 농촌 후계인력을 키우는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오면 재단법인체 농장을 설립, 농촌후계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우리나라 여기저기 농촌에 파견해 서로가 상부상조하면서 농촌을 메고 가도록 하는 것이 꿈이지요.” 그 꿈의 현장이 ‘제주생명농업재단’이다. ‘세계평화의 섬’ 제주에서 꿈을 펼쳐 가는 오재길 선생. 그에게 90이란 나이는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이상길leesg@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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