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식의 엄마하고 나하고

나는 많은 임종들을 지켜보면서 어떤 죽음이 행복한 죽음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위험. 고생. 사고.

이들은 우리 인생에서 피할 수 있으면 피해 가는 것이 좋다. 형제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봄놀이 여행을 떠나기로 하기까지는 쉽지 않은 결단이 있었다. 여행길에서 돌아 가셔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내 달리는 유람선 갑판에서 가슴이 벅차올라 심장마비로 어머니가 쓰러진다 해도 괜찮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 여행을 떠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극단으로 치달은 생각 같지만 많은 임종들을 지켜보면서 어떤 죽음이 행복한 죽음인가를 생각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행에 앞서 하나 더 결단을 한 것은 여행길에서 내게 닥치는 어떤 고생도 견디어 내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안전과 행복한 여행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여행에서 돌아 온 뒤 어머니는 하루 정도 쉬는 시간을 가진데 비해 나는 사나흘을 드러누워야 했다.

두어 달 전에 목격한 어떤 임종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여든넷이 된 홀로 사는 할머니가 돌아 가셨다. 충남 어느 마을이다. 절친한 후배가 사는 그 마을에 가끔씩 가는 내가 그 할머니를 처음 본 것은 5년 여 전이다. 나를 보자마자 “봉근아.” 하면서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봉근이는 그 할머니의 아들이라는데 할머니는 서울에서 부자로 사는 아들 오기만을 기다리며 혼자 살고 있었다.

혼자 힘으로 텃밭이라도 가꾸던 할머니는 어느 때 부턴가 바깥출입이 어려워지고 방 안에만 있게 되었는데 점차 사람을 못 알아보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인 요양원을 거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자녀들은 고향집을 수세식과 입식으로 고쳐놓고 내 후배의 아내에게 뒤를 봐 주라고 한 달에 20만원씩 주었다는데 가끔씩 전화를 하면 노골적으로 언제 돌아가시는지에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고 한다.

임종을 앞두고는 몇 달을 방안에 요강을 두고 대 소변을 받아 냈는데 나중에는 욕창이 생겨 살이 썩어 들어가 집안에 썩는 냄새가 앙등을 했다고 한다. 후배 부부는 오로지 인간애적 측은지심으로 할머니를 돌봐 드렸는데 자식에 대한 원망과 저주로 삶의 마지막 나날들을 보냈다고 했다.

노인전문병원에서 몇 번 목격했던 임종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녀들의 무표정한 사무적인 태도들이 돌아가신 분의 영정 앞에서 버젓이 용인되는 분위기가 못내 어색했던 기억이다. 특히, 모든 장례음식들이 일회용 또는 싸구려 플라스틱 그릇에 아무 성의없이 담겨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건 죽음에 대한 결례라고 생각했다.

노인관련 영화, 다큐, 드라마, 소설, 수기나 사례집 등은 닥치는 읽고 보았다. 노인관련 누리집들도 다 찾아보았다. 우연히 읽게 된 ‘인천시민문예당선작’에 소개된 글은 충격이었다.

노인 시설에서 노래강사로 활동하는 저자가 한 노인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일기였다.

나를 볼 때 무엇을 보십니까? 당신이 하는 일을 눈치도 못 채는 듯 보이고 항상 벗겨지는 양말, 별로 영리하지 못한 움츠려든 늙은 노인, 먼 곳을 보는 듯한 눈과 변덕스런 습관, 대답을 잘 못하고 음식은 흘리고, 당신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고 당신이 먹이는 대로 받아먹지만 나는 말하리라.

열여섯 살 소녀 때에는 발에 날개를 달고 사랑하는 사람을 곧 만나리라 꿈을 꾸었고, 뛰는 가슴을 안고 스무 살 신부가 되어 기쁜 가정을 이루었다고. 내 어린 자식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쉰 살에 내 무릎 밑에는 손자들이 놀았다고.

나는 기억하오. 즐거웠던 순간들과 쓰라렸던 시간들을. 그리고 아무 것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 쭈그러진 노인으로만 보지 말고 가까이서 나를 봐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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