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식의 엄마하고 나하고

바느질을 할 때는 어머니의 정신이 초롱초롱 하셨다. 바늘 끝에 시선을 두고 한 땀 한 땀 바늘을 놀리시면서 고도의 집중을 해서인지 한 번도 헛소리를 하시거나 망상에 빠지지 않으셨다.

골무를 둘째손가락에 끼신 어머니는 바로 바느질거리를 찾으셨다. 가장자리가 풀려있는 보자기를 드렸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홀치기를 하셨다. 골무 안쪽에 얇은 양철 판이 들어 있었나보다.

“옛날에는 겨울 옷 쪼가리로 골무를 맹글랐는데 이거는 얇직한데도 바늘이 쏙쏙 잘 들어가네?”라며 좋아하셨다.

바느질을 할 때는 어머니의 정신이 초롱초롱 하셨다. 바늘 끝에 시선을 두고 한 땀 한 땀 바늘을 놀리시면서 고도의 집중을 해서인지 한 번도 헛소리를 하시거나 망상에 빠지지 않으셨다.

바느질을 하면서 맑아지는 어머니의 정신을 보고는 꾸준히 바느질거리를 챙겨 드렸다. 환몽에 사로잡힐 때나 감정이 상해 있을 때 슬며시 바느질거리를 드리면 거짓말처럼 기분을 바꾸셨다. 이것이 안 통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 반짇고리를 차고앉으시면 모든 상념을 잊고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셨다.

어릴 때 우리 형제들의 양말은 본 바닥은 다 닳아 없어지고 색깔도 요란하게 몇 겹으로 기워져 있곤 했다. 일을 하고 신발을 벗으면 신발에서 흙이 한 소쿠리요 양말 기운 틈새에서 흙 부스러기가 한 사발이 쏟아지곤 했었다. 그 얘기를 하시면서 어머니는 바느질 끝을 따라 추억 여행을 즐기시곤 했다.

언젠가 어머니가 뜨개질 자랑을 하시기에 바로 뜨개질실을 사다 드렸던 적이 있다. 인터넷에서 아크릴 사로 된 세제 안 쓰는 수세미 뜨개질 뭉치를 샀는데 이건 실패했다. 코바늘을 탓 하면서 뜨개질은 사양하셨다.

“코바늘이 뭉퉁하이 이기 먹꼬? 대나무로 얄푸락하게 맹글라야지 뭉퉁하게 이걸 각꼬 어짜락꼬?”

어머니는 뜨개질을 잘 해서 동네에서 소문이 났다고 자랑을 했었다. 점점 자랑이 길어지더니 우리 형제들 조끼는 물론이고 속옷도 뜨개질해 입혔다고 하셨다. 급기야는 팬티도 대바늘로 떠서 해 입혔고 호주머니도 따로 떠서 단 게 아니고 실 한 가닥을 한 번도 끊지 않고서 만들어 냈다는 것이었다.

동화 같은 뜨개질 무용담이 긴가민가하여 인터넷을 검색해서 사 드렸는데 뜨개바늘을 문제 삼고는 끝내 손을 대지 않으셨다. 아마도 자신이 없으셨는지 모른다. 양말을 꿰매 놓으신 것도 보면 전혀 옛날 솜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기분이 몹시 구겨져 있을 때였다. 음악이나 향이나 먹을거리까지 백약이 무효여서 시도 한 것이 양말에 일부러 구멍을 내서 슬그머니 어머니 누워계신 코앞에 발을 내 민 적이 있다. 겨울에 구멍난 양말을 신고 있는 아들 발을 유심히 보시던 어머니는 서서히 기분을 바꾸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못 본 척 하시더니 시간이 지나자 일어나시더니 “양말 이리 벗어줘라.”고 하셨다. 양말을 꿰메시려고 실을 찾고 바늘을 꿰고 하면서 완전한 모성의 자리로 옮겨 앉으셨다.

“내가 니 양말 한 컬레 사 주기는 커녕. 빨아 주지도 못함스로 겨울에 빵꾸 난 양말 신고 댕기는 것도 모르고 츳츳.”

양말에 구멍이 나서 뒤꿈치가 시렵다고 엄살을 부렸더니 역시 어머니는 혀를 차시면서 맑은정신을 수습하셨다. 자식 입성 챙기고 걷어 먹이는 본성은 세상 어머니가 다 같아 보였다.

밭에 일을 하러 갈 때는 트럭에 어머니를 태워 일 하는 내 모습이 잘 보이는 곳에 세워둔다. “내가 국시라도 한 그릇 끓여 갖다 주면 올매나 좋을꼬. 일 하는 사람 부애 나고로 구경만 하고 앉았다.”

내가 허리를 펴고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면 어머니도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다. “일이라는 기 끝이 있나. 인자 좀 쉬었다 하그래이. 몸치난다. 아이고.”

어머니의 동경어린 옛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 새참을 싸 와서 밭둑에 마주 앉아 먹을 때는 어머니가 먼저 수저를 드시는 법이 없다.

“너 먼저 먹어라. 꾸부리고 엎드려서 올매나 허리 아푸노? 어서. 어서 먹거라.” 늘 그랬다. 어머니 본연의 자리. 모성성을 회복 하실 때는 치매 끼가 전혀 없으시다.
한국농어민신문webmaster@agrinet.co.kr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