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식의 엄마하고 나하고

꿈은 늘 신비한 시간여행을 펼쳐 보인다. 현실공간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현실 시공간의 제약 밑에 있는 것도 아니다. 고교시절에 읽었던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에 있던 이런 대목이 기억난다.

석양빛을 받으며 들녘을 거닐고 있는데 교회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그 종소리는 사실 동네 교회에서 새벽종을 치는 소리였다는 것이다. 석양과 들녘과 종소리는 꿈을 구성하는 묘한 조합이 된 셈이다. 결론적으로, 꿈에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한데 섞여 있는 것인데 해몽은 이를 잘 갈라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실 과거니 미래니 하는 개념 자체가 3차원 세계에서나 쓰이는 말이지 누 차원 세계에서는 그런 구획 자체가 없을 수 있다. 치매 노인은 3차원 세계를 넘어선지 오래된 존재들이다.

어쨌든 웅크리고 자는지 똑바로 누워 자는지, 자는 동안에 방안의 온도나 향, 그리고 음악이 꿈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가 프로이드의 이 책이다.

외적 환경 외에 어떤 꿈을 꾸느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의 세계이다. 잠재의식은 현실생활의 근원이 된다. 의식세계의 생각과 행동은 프로이드에 의하면 존재의 일부에 불과하다. 즉,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잠재의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현실생활을 바꾸는 것도 가능한 일이 된다. 잠재의식과 현실의식이 만나는 접경이 꿈의 세계다. 내가 어머니의 꿈길을 따라 들어가는 이유다.

잠들기 전에 어머니의 손발을 깨끗이 씻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잠자리에 들게 한다든가 방을 따뜻하게 하고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잠들게 하는 것이 어머니 꿈에 개입하는 나의 첫 번째 조치다.

그 다음이 중요하다. 어머니 꿈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다. 노인들은 현실의식과 잠재의식의 구획선이 분명하지 않다. 꿈과 현실의 구분도 잘되어 있지 않고 꿈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도 크고 오래간다. 종일 꿈속에 살기도 한다. 과거와 상상이 뒤범벅이 된 속에서 살다보니 의료인들은 이를 손쉽게 망상이니 환청이니 하고 정신병이라고 부른다.

프로이드의 논리에 의하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망상(꿈=잠재의식)에 존재의 기반을 두고서 일부만을 현실세계에 노출시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존재의 근원에 접근해 있는 치매노인들을 병자라고 부르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본인이나 주변사람이 괴롭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괴로워야만 하는지는 다시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치매노인들의 꿈과 현실이 뒤섞여 있다는 이유에서 내가 어머니의 꿈속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동안의 내 경험이다.

이때마다 나는 두 가지 방향으로 어머니의 꿈에 개입한다. 하나는 전회에 소개 했듯이 꿈과 현실, 즉 망상과 현실을 정확히 분리시켜 주는 방향으로 개입을 하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참담한 현실을 꿈과 연결시켜서 속히 현실의 암울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불과 옷에 흠뻑 오줌을 누셨을 때였다.

새벽녘에 어머니의 부시럭거림과 코끝을 자극하는 지린내에 잠이 깼다. 말똥말똥한 어머니의 상태가 느껴졌고 젖은 이불을 몰래 발로 눙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꿈 꿨죠?”

“엉?”

“하하하.... 어머니 아까 꿈 꾸셨죠? 아까 막 잠꼬대하시던데요?”

“몰라. 와 이라능고 몰라. 꿈을 꿨는지 어쨋는지.”

“저도요. 꿈에 오줌 누면 꼭 옷에 오줌 눠요.”

“꿈을 꿨는지 어쨋는지 내가 와 이락꼬 맨날. 몬살아. 이래각꼬 오찌살아.”

이렇게 하면 일단 오줌 누신 것을 자연스레 드러내게 했으니 한 고비는 넘긴 것이다. 어머니의 좌절을 위무하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이때 잘하면 그날 하루가 쾌청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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