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식의 엄마하고 나하고

백운역 할아버지 계신지 찾아오겠다고 차에서 내리려하자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어머니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야야. 인자 우리 고마 가자. 장계 집으로 가자”

‘맛있는 집’.
우리가 차를 세운 곳이다. 아직 점심은 이른 시간이라 식당 주차장은 비어 있었다. 차량들은 없었지만 소낙비가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여유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늘이 쪼개졌나. 와 이락꼬?”
어머니는 캄캄해지는 하늘이 걱정이 되시나보다. 이래가지고는 백운역 할아버지를 찾아 갈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머니 걱정을 애써 무시하고 나는 씩씩하게 식당에 들어가서 먹을거리를 찾았다.

두부요리 전문 식당이었는지 두부를 삶아 건지고 있는 게 보여서 갓 삶은 두부 한모를 사 왔다. 따끈따끈한 두부에서 고소한 콩 냄새가 났다. 풋 김치도 함께 사 왔다. 두부를 본 어머니는 크게 반가워했다. 트럭 안에서 어머니랑 붙어 앉아 간장을 무릎에 흘려가며 두부를 먹었다. 트럭의 양철 지붕위로 떨어지는 장대비는 콩 볶는 소리를 냈다.

누가 보면 늙은 우리 모자가 연인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고집불통의 노인네가 우물우물 콧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두부를 맛있게 잡수고 계셨다. 빤히 쳐다보는 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어머니가 두부를 한 젓갈 떼어내서 내 입에 넣어 주셨다.

두 사람 다 마음이나 배가 두둥실 불러 가지고 식당 주차장을 나왔다. 나는 남원 터미널 옆 한 건물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백운역 할아버지가 이사 가셨다네요”라고 보고를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눈치를 어머니가 내게 보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로 이사 갔는지 제가 약도를 잘 받아 왔어요.”
건물 우체통에 꽂혀 있던 광고 안내전단을 보여 주면서 이사 간 곳으로 찾아가자면서 차를 돌렸다. 나는 전주로 향했다. 어머니는 상당부분 백운역 할아버지에게서 풀려나고 있었다.

“나락 모감지가 커질라믄 나락 꽃이 들어왔다 나갔다 해야 되는데 비가 무장 더 오네?”
“그러게요. 햇볕이 나야 나락이 영글텐데요”
“내리 사흘이나 와서 인자 안 오지 시푸디마는 장마 끄트리가 기네”
“비는 며칠 더 온대요”
“산이 저거 맹키로 하늘에 닿아 있으믄 비가 오는 기라. 하늘이 높이 올라 가믄 맑아지는 기고”
“그 보다도 백운역 할아버지가 어디 안 가고 집에 계셔야 할텐데 비 오는데 어디 안 가셨겠죠?”
“그걸 누가 아노. 두 발 성한 사람이 오델 못 가건노”

백운역 할아버지를 못 만날 수도 있다는 투였다. 어머니는 서울이 참 넓다고 하셨다. 한 시간을 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전주에 들어와서 중앙 대로를 달리는데 큰 사거리 건물에 우민교회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비가 멎고 터진 구름 사이로 햇살이 교회위로 내 비치고 있어서 우리를 그쪽으로 안내하는 듯 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 바로 저기에요. 교회 뒷집으로 이사 갔다고 했거든요. 다 왔어요.”

건물 뒤로 차를 대자 소낙비가 다시 쏟아졌다. 우산을 받쳐들었지만 빗줄기가 옆으로 후려쳤다. 건물로 올라간 나는 화장실로 가서 볼일부터 봤다. 맥이 탁 풀어지는 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목욕탕에 가서 푹 쉬고 싶었다. 목욕탕 못 가 본지가 반년이 넘었지 아마. 어머니가 집에 오시고 단 한 번도 목욕탕이나 이발소에를 가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수염도 못 깎아 가위로 잘라 내고 머리는 바리캉으로 박박 밀고 있었다.

“집에 있더나?”
“아뇨. 저쪽에 있는 노인정에 갔대요”
나는 교회건물에서 나와서 바로 차를 몰고 또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삼성전자 서비스센터 건물이 보였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이곳이 동네 노인정이라니 백운역 할아버지 계신지 찾아오겠다고 차에서 내리려하자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어머니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야야. 인자 우리 고마 가자. 장계 집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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