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연대하라, 그리고… 쉼없이 저항하라

이 사회의 불의와부조리에 저항하지 않는다면…그것은 세상이 덜 비참하기 때문인가,아니면이 시대의 페스트인물신주의에비참하게 투항했기 때문인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30년도 더 전에 읽은 소설을 다시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우리는 지금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는 사회’에 살고 있다. 오직 물질의 크기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한다. 사람의 길은 자동차 도로에 밀려났고, 영악한 젊은이들은 ‘5년 안에 10억 만들기’에만 촉각을 세우고 있다. 자신에게 다가온 불이익에는 무섭게 분노하지만 사회 불의와 부조리에는 차갑도록 무관심하다. 더불어 사는 인간성의 항체가 죽고 있는 것이다. 내가 <페스트>를 다시 펼친 것은 카뮈의 ‘저항하라’는 외침을 다시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에게 사랑하고, 서로 연대하며, 쉼 없이 저항하라고 말한다. 사회 불의와 부조리에 저항할 때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이 사회에 팽배한 물신주의는 오늘날의 페스트다. 세균으로 인한 질병은 치료약의 개발로 극복할 수 있지만, 경쟁과 물질 만능주의에 오염된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위한 치료제는 없다. 영혼과 정신을 잃어버린 인간은 더 이상 ‘악’에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여유나 짬을 허락하지 않는 고달픈 일상이라 하더라도 이 소설을 읽기를 바라는 것은. 1940년대 알제리의 오랑시. 의사 베르나르 리유의 발에 죽은 쥐가 차인다.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도시를 향해 다가온다. 한사람 두 사람 죽어나간다. 도시는 빠르게 페스트에 전염되고 인심은 흉흉해진다. 페스트의 창궐이 선언되고 도시는 폐쇄된다. 도시에 남은 것은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이별을 부르는 전염병 페스트뿐이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 군상들이 펼치는 드라마는 그렇게 시작된다. ‘페스트’가 상징하는 것은 물론 사회악이다. 지난날의 파시즘이며, 오늘날의 이라크 전쟁이며, 신자유주의이고, 농산물 개방정책이다.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온갖 형태의 압제이고 부조리다. 선출하지 않은 권력인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무역기구(WTO)가 우리 삶을 마구 헤집고 위협한다. 카뮈는 이 부조리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들에게 악에 굴복하지 말고 저항하라고 역설한다. 왜소한 인간에게 끝없는 ‘부조리’에 대한 저항은 끝없는 패배일 수 있다. 절망하면서도 악과 끝까지 싸우는 타루와, 세상에 대한 환상 없이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바를 찾아 좇아가는 리유 의사가 나누는 대화는 이런 것이다. 타루 : “당신의 승리는 그래봐야 항상 임시적일 뿐이야.” 리유 : “그건 나도 알고 있지. 그러나 그렇다고 투쟁을 멈출 수는 없잖아.” 타루 : “그래, 그게 투쟁을 멈추는 이유는 안 되지. 그래서 나는 페스트가 당신에게 과연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는 거야.” 리유 : “그건 끝없는 패배지.” 타루 : “누가 당신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했지? 의사양반?” 리유 : “비참” 까뮈는 ‘비참’에서 자유를 배웠다고 말했다. 비참함에서 인간을 구원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뿐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만 인간의 비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각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연대, 그리고 신뢰로 이어진다. 신뢰와 연대의 필요성은 인간의 노력과 열정을 대신할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부질없는 고민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시대정신이 지금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이 덜 비참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정신이 이미 이 시대의 페스트인 물신에 비참하게 투항했기 때문인가?<홍세화 : 한겨레 편집국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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