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억누르며 정신 없이 달려온 1년. 무인년을 보내고 기묘년 새해를기다리는 이 겨울, 농민들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 무겁다. “빨리 이 해가 가고 내년에는 레드산드라와 노블렉스 장미향기 가득한 농장에서 일하고 싶다.” 지난 여름 당한 수해 때문에 크리스마스 전날인 24일에도 새벽부터 하우스에 나와 혼자 복구작업을 하고 있는 경기 고양시 이유태(39세, 장미재배)씨가 던지는 말은 지금 농민들의 구멍뚫린 심경을 그대로 말해준다. 올해는 지난해말 준비 없이 들이닥친 IMF로 인한 환율상승으로 기름, 농약, 비료, 농기계, 배합사료 등 모든 농자재값이 불과 몇 달사이 20~40%나폭등했고, 경제위기로 소비마저 위축돼 거의 모든 품목, 모든 축종이 가격폭락을 피할 수 없었다.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엄습한 수해와 태풍피해는농민들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해복구비와 일할수록 늘어나는 농가부채에 대한 정부의 미흡한 대책은 국민의 정부 농정에큰 기대를 걸었던 농민들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기름값, 자재값 부담 때문에 올해처럼 어려운 적은 없었다. 내년에 또올해처럼 오른다면 영농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월정동에서 오이, 고추 등 시설과채류 농사를 짓는 서문기(41세)씨는 하우스를 돌보면서도 기름값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역시 올 여름 수해로 포도농사를 망친 경북 상주 정의선(48세)씨는 “지금도 포도밭에 봉지째 매달린포도를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아픈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한우를 사육하는 충북 음성의 안병호(45세)씨는 “사료값은 폭등하고, 소값은 떨어져 마음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면서 “무엇보다 수소 거세육을 하는 입장에서는 올 고급육 생산기반이 하루아침에 무너진게 안타깝기 그지 없다”고 말했다. 적게는 수천에서 수억원까지 정책자금이나 농·축협 상호금융으로 빚을 지고 있는 거의 모든 농민들에게 IMF와 수해로 얼룩진 올 한해는 더는 돌아보기 싫은 해로 각인되고 있다. 소 부루세라 유산피해 등 유난히 많았던 질병과 불량비료 피해도 농민들을고통스럽게 한 일로 기억된다. 경기 이천의 낙농가 김동환씨(40세)는 “조사료 수급 불안, 소 부루세라,분유재고 과잉 등 어느때 보다 어려운 한해였다”면서 “특히 부루세라 파동에 대한 피해보상이나 원유계약생산제에 대한 명확한 처방이 없는 상태라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고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최흥식 한국농업경영인 태백시연합회장(35세)은 “4만2천평 배추농사가 불량비료와 무사마귀병으로 수확이 3분의1 이하로 줄었다”며 “병원균이 밭전체로 퍼져 배추는 물론이고 무나 양배추도 불가능해 옥수수를 해볼까 고민하지만 투자비용이나 수매가를 고려할 때 선뜻 내키지 않는다”고 내년을걱정했다. 미흡한 농가부채 대책, 좀처럼 내리지 않는 농·축협의 금리도 고통을 깊게 하는 요인이다. 전남지역의 해안가에 사는 한 농민은 “정부 부채대책도문제지만, 아직도 16~17%의 금리에 3개월이면 23%로 복리의 연체금리를 요구하는 일선 농·수·축협의 실태를 정책당국은 아느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어려운 한해를 보내면서도 기묘년은 보다 나은 삶을 기대하면서 새해 영농을 설계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에 대해 “우리도 노력하겠으니 정부는 보상할 것은 분명히 보상하고, 무엇보다 가격보장을 통한 소득안정에 우선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경기 양주에서 인삼을 하는 이길호씨(56세)는 “새해에는 경기가 호전됐으면 좋겠다”면서 “인삼은 수출도 중요하지만 내수진작에 의한 가격보장이경작기반 유지의 관건인 만큼 이런 방향으로 정책을 펴나갔으면 한다”고희망을 피력했다. 광주의 서문기씨도 “농산물은 무엇보다 가격의 폭락이 없어야 안정적인영농에 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경기 안성의 장대석씨(60세, 양계)는“시설확충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능력에 맞게 사육기반을 다지는 지원이절실하다”는 의견이다. 충북 음성의 안병호씨는 “한우가 제값을 받을 수있도록 차별화와 품질경쟁력 제고를 포기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수해를 입은 고양시의 이유태씨는 “우리도 노력하고 있지만 정부는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조성을 위해 적합한 보상기준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부족하고 어두운 세밑, 그러나 농민들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다지면서 올해보다는 나아질 내년을 기대하고 있다.<이상길·엄일용·정문기·문광운·유영선 기자>
이상길leesg@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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