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 지난 95년과 96년 사이 전남북과 충남, 경기 등 전국의 39개 지역농협이쌀판매사업 과정에서 유통사기단에게 수백억원대의 대규모 사기를 당한 사건은 협동조합 임직원들의 전문성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이는 지역농협의 사업 담당자들이 중앙회로 보고하는 실적에 연연해 외상거래 등 편법 거래가 일반화 됐던데도 원인이 있지만 담당자들 자체가 유통업자들과상대하기에는 미곡유통에 대한 사명감과 전문적인 식견이 너무나 부족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협동조합 임직원들의 전문성 문제는 오늘 협동조합이 겪고 있는 경영의 위기를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UR타결과 WTO체제의 출범으로 상징되는 무한경쟁시대의 개막으로 협동조합은 위협받고 있다. 이미 외국농산물과의 무차별적인 경쟁이 시작됐고 유통시장개방으로 다국적 유통기업들과 거대 재벌기업의 유통부문이 농산물 시장으로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한편에서는 외환 및 자본거래 자유화 등으로 외국의 저금리 자본유입이 가속화되고 있고 금리자유화로 협동조합 신용사업의 수익성이 줄어드는게 현실이다. 농수축협 가운데 가장 탄탄한 농협만 해도 지난해 중앙회 점포 가운데 85개, 회원조합중 42개가 적자를 본 사실은 이런 상황을 웅변해주는 것이다.변화는 이미 이미 예견되고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사업을 영위하는어떤 경영체도 예외일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이다. 이같은 변화를 기회요인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 바로 전문성의 확보다.
그렇다면 우리 협동조합의 전문성은 어떤 수준인가. 우리나라 협동조합은지난 역사 동안 국내외 환경변화에 대해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기르지 못했다. 그것은 협동조합이 오랜 기간 동안 정부의 통제를 받아 왔고, 그 우산속에서 정부의존적인 성장과정을 밟아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조합원이나 회원조합에 대해 책임을 지는 ‘협동조합적인 책임경영’보다는정부의 눈치를 보는데 더 익숙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협동조합적인 전문성이 배양될 수 없었다.
사업부문별로 보면 협동조합 임직원들의 전문성이 이 시점에서 어느 수준인지 여실히 드러난다.95년과 지난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쌀사기 사건에서도 그랬지만 각종판매사업의 경우 협동조합 임직원들의 전문성 문제는 심각하다. “농협이요?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정부 지원이나 농민이라는 안정적인 공급원이없다면 소비지시장 다 놓쳐요. 땅짚고 헤엄치는거 아닙니까.” 국내 유수의대형 유통업체인 J유통의 한 바이어가 하는 말이다. “순발력이 전혀 없어요. 물론 디스플레이나 서비스 등 다른 측면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무엇보다 전문성이 요구되는 영농지도사업은 최근 농협을 비롯한 각협동조합이 높은 관심을 갖고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도 영농지도사가 없는농협이 17%에 이른다. 영농지도사와 부녀부장이 구 퓔탓 투입되는 경우도허다하다. 영농지도사가 있다고 해도 생산.포장.냉장.유통.가공.경제성 등종합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은 전무하다. 영농지도 자체의 전문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농지도에 나서는 넌센스가 협동조합 영농지도의 현주소다.
농협 가공사업의 경우 공장 가동률이 60% 수준에 그치고 있다. 중앙회와회원농협이 운영하고 있는 1백82개 공장 가운데 1/3인 65개소가 적자를 나타냈고, 농협 가공제품 판로확보를 위해 개설한 ‘농협 가공제품 서울물류센터’도 13억원의 적자를 시현했다. 이는 회원조합에 대한 서비스 차원이기 때문에 수지를 맞추기 어렵다는 변명도 가능하지만 결국 마케팅 전략이라는 전문성의 부재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구매사업분야도 마찬가지다. 비료.농약.배합사료.생활물자.농자재 등 각종계통구매사업이 중앙회를 통해 이뤄지고 있지만 상당수의 분야에서 일반업체나 대리점에서 판매하는 가격이 더 싸다는 여론이 있다. 이는 농협이 최대의 구매자라는 압도적인 교섭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협상력이 미흡해서 나타난 결과라는 분석이다. 최근 발생했던 4종 복합비료 과다보유 사태는 일선 지역농협 구매담당 직원들이 농민들의 구매수요를 제대로 파악하지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업체와 협상했기 때문에 빚어진 측면도 있다.
이런 현상은 신용사업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 농협의 경우 신용사업부문의1인당 총수신은 5대 시중은행이나 지방은행보다도 현저히 낮다. 다른 계수를 보더라도 직원 1인당 순이익, 점포당 총수신, 점포당 순이익은 낮은 반면 직원 1인당 경비, 직원 1인당 인건비는 오히려 높다. 한마디로 고비용,저효율 구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판이다. 최근 커다란 사회적 부작용을빚고 있는 부도재벌 한보와 삼미에 대한 대규모 여신지원사태는 부실기업을보는 안목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전문성 부족의문제인 것이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을 기본으로 하지만 임직원 또한 주요한 주체이다. 특히사업의 추진과 일선 경영에서는 임직원이 곧 협동조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임직원들은 협동조합의 실질적인 운영책임자로서 전문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협동조합의 임직원은 일반 사기업의 월급쟁이도 아니고 준공무원도 아니다. 정부의 통제와 보호아래 마치 악어와 악어새처럼 존재하던 탁상머리 근성을 가지고는 ‘돈되는 일이라면 어떤일도 마다 않는’ 일반기업들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
일반기업들은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임직원들의 전문성 강화에 매우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협동조합이 21세기를 주도한다고자임한다면 이러한 조류를 협동조합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농수축협의 인력육성사업은 품목별.사업별 전문가 양성으로 방향을 하루속히 전환해야 한다. 각 협동조합 교육기관의 커리큘럼은 전문가 과정을 강화하고 기존 임직원에 대한 보수교육도 전공제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전문성의 확보는 단순히 교육으로만 해결될 일은 아니라 조직측면에서 고려되는 것이 보 본질적인 것이다. 농수축협은 종합농협, 종합축협일변도인 현재의 조직체계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전문조합의 육성에 나서야한다. 품목별 업종별로 전문화된 조합과 이의 연합인 전문조합전국연합조직의 결성이 자유로워야 한다. 신용. 姸┿獰汰肝동일단위내에서 추구되는 현재의 중앙회체제에 대한 신중한 재검토도 필요하다. 그리고 기존 조합도 협동조합법에 명시된 상임이사제를 도입함으로써 경영의 전문화와 효율화를기해야 한다.
다만 이같은 전문성의 내용 속에는 사업별 전문화라는 속성과 함께 협동조합 운동이라는 속성이 함께 녹아들어 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한다.
발행일 : 97년 4월 14일
이상길leesg@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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