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 잠자는 6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동안 박정대(36세, 경남 김해시 대동면 초정리)씨는 아내와 하루내내 하우스에서 지낸다.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수확하는 수출용 백합 때문이다. 키가 큰 박씨는 얼마전 아내에게 한소리 들었다. “그래 허리를 자주 펴서 언제 다 딸라고 그랍니꺼.” 백합따는 일이 한창일때는 가족들이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도 잊는다. 열살 수현이와 일곱살 연희가 학교에서 돌아와 조막손으로 밥을 챙겨 먹기 시작한 것도 백합을 시작하면서부터다.“우리집 애들이 젤로 불쌍하지예. 제때 밥도 못챙겨준다 아입니꺼.”그나마 박씨 가족이 작은 여유나마 가질 수 있는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릴때다. 맑은 날보다 수확량이 상대적으로 적어지기 때문이다.<7백50평 하우스에 백합 식재>지금 백합을 따고 있는 박씨는 사실은 10년동안 소를 키우던 축산농가였다. 그러던 박씨가 백합을 선택한 이유는 자꾸 채산성이 떨어지는 한우보다는 좀더 공격적인 작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소득도 높고 전망도있는 이런저런 작목을 궁리하던 박씨에게 마침 인근 대동농협의 김형섭 지도사가 찾아와 수출용 백합을 권했던 것.백합으로 결정한 박씨는 이때부터 그야말로 화장실 갈 틈도 없었다. 백합의 ‘백’자만 들어도 어디든 한달음에 쫓아갔다. 백합은 모두 같은 품종인줄로만 알았던 박씨는 카사블랑카, 르네브, 마르코폴로, 시베리아 등 그렇게 품종이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꽃대가 훨씬 크고 오랫동안 개화하는‘카사블랑카’도 이때 처음 봤다. 첫 눈에 반한 박씨에게 다른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본격적인 백합농사를 위해 지난해 박씨는 7백50평의 비닐하우스를 마련했다. 이어 10월에는 4만6천구의 백합 ‘카사블랑카’를 식재했다. 이때부터 ‘백합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비닐하우스 내부온도를 맞추느라 밤을 새운적도 허다했다. 바이러스 걸린 백합을 볼때면 밤잠 안자고고생한 모든 노력이 헛고생인 것 같아 속도 많이 상했다.특히 이럴때 처음 아들의 ‘업종변경’을 무던히도 반대했던 예순여섯 되신 어머니 얼굴을 대할땐 가장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예서 주저 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확을 앞둔 수출용 백합의 탐스러운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던 박씨는 여기서 그만둘 수 없었다. 백합에 더욱 매달렸다.<세심한 손길로 수확 군 >이러기를 10개월, 따내도 따내도 끝이 없어 보이던 수확작업은 이제는 아내가 더 잘해낸다. 해질녘까지 백합을 따고 해가 진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선별작업을 한다. 박씨 부부가 하우스에서 수확한 백합을 어깨에 짊어지고선별장으로 오면 박씨의 어머니가 길이별, 꽃수별로 백합을 골라낸다. 100㎝, 90㎝, 80㎝의 몸길이에 5륜, 4륜, 3륜으로 분류된 백합들은 5본단위로묶여 폴리에틸렌(PE) 포장지로 정갈하게 포장돼 한 상자에 20본씩 넣어진다. 5본씩 묶였으니 4벌이 함께 포장되는 셈이다.1장에 70원하는 폴리에틸렌 포장지에 싸여진 백합은 다시 하얀 무광택종이에 조심스럽게 덮여져 최종 포장을 마치게된다.백합농사를 그리도 반대하시던 어머니. 하지만 이제는 백합 선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가 되셨다. 동네에서는 박씨와 그의 아내, 어머니를 이제 ‘백합 박사’로 부른다. 선별·포장이 끝난 백합은 상자에 담아 크기와 수량에 따라 각각 구분돼탑차에 실어진다. 이때가 오후 4~5시경. 15분뒤면 김해공항에 도착한다. “아마도 자식을 시집보내는 부모 심정이 이럴깁니다. 탑차에 실리는 백합을보면 마음이 찡하기도 하고요. 저녀석이 일본으로 가서 좋은 값을 받아야할낀데, 일본에서는 어떤 소비자를 만날꼬,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입니꺼. 지는예, 날마동 백합을 시집보냅니더.”행여나 상처난 잎파리는 없는지, 꽃대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마지막까지세심한 신경을 쓰는 박씨의 얼굴에 아쉬움과 우려가 엇갈린다.<밤 12시까지 이어지는 포장작업>포장된 백합이 탑차에 실리면 박씨 가족의 일은 일단락지어진다. 새참을먹을 시간도, 함께 일하는 가족들에게 ‘수고했다’는 눈인사 한번 건넬 시간도 없었던 박씨 가족들은 비로소 잠깐의 짬을 갖는다. 애들도 챙기고, 어머니와 아내에게 몇마디 말을 건내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그도 잠시. 차한잔 마시고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2차 상차작업을 한다. 하루종일 작업한 물량을 한번에 다 내보낼 수 없기 때문에 우선 오후 4~5시쯤 1차 수출물량을 내보내고 난 후, 2차로 보내기 위해 밤 12시까지 선별과 포장작업을하는 것. 그렇게 포장한 백합은 다음날 아침 일찍 탑차에 실어 공항으로 보내진다.공항에 도착한 백합은 곧 검역관의 손에 넘겨진다. 이때부턴 국립 식물검역소 부산지소 김해공항 출장소 검역원들의 손이 부산해진다. 메스를 쥔 집도의사처럼 검역관은 무작위로 골라낸 포장상자를 긋고 백합 여러개를 들춰낸다. 꽃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고 진딧물은 없는지, 혹 유충이라도 붙어있지 않은지를 확인한다. 때론 꽃을 거꾸로 들고 세차게 흔들어보기도 하고, 꽃잎을 하나하나 뒤집고 살펴보기도 한다.“이런일도 있었어요. 장미를 거꾸로 들고 흔들었는데 뭐가 우수수 떨어지는 겁니다. 진딧물이었지요. 순간 얼마나 당황했던지…. 물량도 좀 많은 편이었거든요. 어떻합니까. 생산농가로 반송시켰죠. 대충대충 해서 상대국으로 내보낸다는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약 40여분간의 작업끝에 강연주 검역관은 ‘통과되었음’을 증명하는 자필서명을 검역증에 써 넣고 검역이 끝났음을 알린다. 수출업체 (주)모닝팜의이주승 계장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친다. 검역관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건넨 이계장은 바로 서울 본사로 전화를 걸어 자신에 찬 목소리로 사장에게보고한다.“사장님, 검역 패스하고 지금 실어 보냈습니다.” 물론 박씨 농장에 검역통과 사실이 알려진다.비행기 타고 일본 화훼시장으로…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대일수출이 이루어졌다. 매주 화, 목, 토요일 항공편으로 실려 당일 일본의 10여개 화훼시장으로 공급되는 박씨의 백합은 경매를 거쳐 가격이 결정된 후 일본 소비자 손에 들어간다.올해 우리농산물의 수출목표액은 22억 달러. 환율이 올라 대외경쟁력이 높아졌음을 감안한다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수치다. 검역합격사실을 통보받은 박씨는 “육상경기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지금 당장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더라도 앞을 내다보고 꾸준히 지원해주고 이결과 올림픽 마라톤에서1위를 한것처럼 정부에서도 수출유망품목과 수출농가를 꾸준히 지원해주는정책을 수립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내일 아침 실어보내기 위해다시금 백합꾸러미를 집어든다. 한참 포장작업 중인 밤 11시, 사방이 잠든밤이자만 박씨 선별장의 백열전구는 내일 또다시 떠오를 아침해 만큼이나환하다.<이성희 기자>발행일 : 98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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