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 98년 2월15일 새벽. 권정환(54세·충남 연기군 동면 음암리)씨는 더이상잠을 이룰 수 없었다. 금지옥엽 키운 딸자식을 보내는 마음이 이보다 더할까.샘플로 보낼 4kg박스를 포장하는 권씨의 손길이 떨렸다. 버섯인생 27년만에 이룬 첫 해외수출. 지난 2년여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벅차오르는감정을 한껏 추스렸다. 아직 갈길이 멀고 험하기에. 축배를 들기에는 아직이르다는 생각에서였다.권씨가 팽이버섯을 해외에 수출하기로 결심한 것은 지금부터 5년전. 93년국내에서는 아직 낯설기만 한 팽이버섯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권씨는 남다른 생각을 했다. 국내 내수 뿐만 아니라 수출을 염두에 두었던 것. 좋다고 소문나면 분명 여기저기서 팽이버섯 한다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결국수요보다 몇배 많은 과잉생산이 예상됐기 때문이었다.<국내시장으론 한계, ‘수출’ 결심>아니나 다를까 점차 팽이버섯을 재배하는 농가가 늘어났다. 국내 시장의한계가 피부로 느껴졌다.“언젠가는 그럴줄 알았습니다. 수요와 공급을 못맞추는 게 우리 농업의현실아닙니까. 분명 버섯이 좋다고 하면 다들 몰려들겁니다. 이 속에서 우왕좌왕 하고싶지 않았습니다.”수출, 국내시장의 한계를 해외시장 개척으로 극복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내심 이같은 결심을 굳히고 기회있을 때마다 타당성을 조사했다.여행을 워낙 좋아한 권씨는 싱가폴, 대만, 필리핀, 중국에서부터 인도, 러시아, 프랑스 등 해외에 나갈때마다 여행보다는 팽이버섯 시장조사부터 했다. 명승고적지보다는 식당, 슈퍼체인, 농가들을 돌아다녔다.“미친놈이라고 하데요. 구경은 안하고 괜히 식당이나 슈퍼같은 곳이나 기웃거리니 이상했겠지요.”개의치 않았다. 유창한 영어가 아니니 몸짓 발짓 열의만 갖고 귀찮을 정도로 묻고 생각하고 묻고 생각하기를 여러번. 적당한 나라가 나타나지 않았다. 생각을 바꿨다. ‘수출하니까 가까운 곳이 유리할것’이라는 고정관념도 깨기 시작했다. 먼곳이라도 잠재시장력만 있다면 도전하겠다는 생각을했다.<호주시장 돌아보며 가능성 확인>호주’, 우리나라와 계절적으로 정반대인 곳에 생각이 머물렀다.96년 5월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두려움반, 설레임반. 도착할때까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14시간 꼬박 걸려 도착한 호주땅. 끝없이 너른땅 호주. 푸른하늘, 파란바다를 보며 권씨는 ‘이곳에서는 뭔가 이루어지겠구나’하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예감, 느낌 같은 것이 마음속 저 끝에서한껏 밀려왔다.특히 호주는 아직 팽이버섯은 먹고 있지 않지만 양송이 버섯은 국내보다도생산기술, 규모가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가능성이 엿보였다. “우리양송이 공장은 공장도 아닙디다. 이건 완전히 거대한 기업이더군요.”현대화된 시설, 급증하는 양송이 소비량. 모든것이 희망의 줄기였다. 버섯이 소비된다면 새로운 버섯에 대한 흥미는 충분하리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곧장 현지 시장조사를 시작했다. 이미 이곳에는 중국산 팽이버섯이 수입되고 있었다. 우리것과 비교하니 품질은 조악하기 이를데 없었다. 권씨는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제품과는 상품성에서 현격히 차이가 있는 버섯이 1백g에 호주달러로 3달러 90센트, 우리나라 돈으로 3천7백원이상에 팔리고 있었다.“얼른 계산을 하니까 난 2달러 쪼금 더 받으면 되겠더라구. 중국 물건하고는 비교도 안될만큼 제품 좋겠다, 싸겠다 이건 되는 장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2달러 30센트, 우리나라 돈으로 2천3백원 정도면 항공운임을 빼더라도 6배이상의 수익을 올릴수 있기 때문이다.다음에는 소비처를 물색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우리속담 하나만믿고 무작정 교포들이 밀집돼 있는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호주 시드니에만우리 교포가 운영하는 슈퍼체인이 45개, 식당이 60개나 됐다. 끊임없이 이들을 찾아 다녔다. 어떤때는 버섯 품질로, 어떤때는 한민족이라는 동포애에호소했다.이렇게 혈혈단신 뛰어다니기를 1년 7개월여. 결국 이들 교포들은 물건만좋다면 얼마든지 사주겠다며 우선 샘플을 가져오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때 다행이 호주에 일찍 정착한 권씨의 친구가 입이 되고 발이 돼 큰힘이 되었다. 품질에 대해서 만큼은 자신이 있었기에 권씨는 내심 “이제됐구나”하는 쾌재를 불렀다.<팽이버섯 샘플들고 호주로 …>대망의 98년 2월15일, 샘플로 보일 4Kg의 팽이버섯을 준비하고 김포공항을향했다. 공항내 검역소를 찾았다. 검역소에서 정식수출이 아닌 샘플 운송이라 임시 검역증을 내주었다.호주를 향하는 비행기안. 잠도 오지않았다. 앞날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다. 만약 잘된다면 한국 농산물이 호주땅을 밟는 것이지만 실패한다면그간의 노력이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초조함이 마음을 눌렀다.특히 한국에서의 검역은 통과했지만 호주의 검역, 통관절차는 거의 무지에가까웠다. 부딪치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비행기를 걸어 내려오는 한걸음 한걸음이 비장했다. 수출을 위한 첫 번째 관문인 호주 공항 검역소.“난 한국에서 왔다. 너희 나라에 내가 재배한 팽이버섯을 수출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구세주를 만났습니다. 담당검역사가 여자였는데 저를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하나하나 설명해 주더군요. 그리고 난 후 일단 많은 물량은 아니라 담당자재량으로 검역증을 끊어 줍디다. 20분만에 모든 절차를 마쳤습니다. 뿐만아니라 호주로 버섯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버섯재배사 주위에는 동물사육시설이 없어야 하고, 본국 검역관이 이를 확인해주는 실사증명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자세한 설명은 커녕 아마 며칠은 공항 검역소를 들락날락 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샘플 수출검역은 무사히 통관했다. 한달음에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중국산보다 값도 저렴하고 품질은 월등한 권씨의 팽이버섯을 본 상인들의 주문이 밀려왔다. 예상대로 였다.“그자리에서 1백g포장 1천5백개 주문이 밀려듭디다. 이제는 뭔가 해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장 돌아왔죠.”한국으로 돌아오는 권씨의 손엔 뭔가 해냈다는 자신감이 쥐어졌다호주 검역소에서 일러준대로 실사증명서를 받기위해 김포공항 검역소에 연락을 했다. 주문량은 다 준비했는데 검역관이 온다는 통보가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하루가 마치 일년인듯했다. 전화만 뚫어지게 쳐다봤다.“아니 이제 수출이 되나부다 했는데 검역관이 실사를 안나오니 답답하고죽겄드라구. 근데 1주일이 지나고서야 전화가 오더니 버섯에 대해 다 아니까 굳이 실사까지 할 필요가 없으니 제품갖고 공항으로 나오라고 하드라구요.”주문량 1천5백개를 갖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식적인 첫번째 수출이었다.하지만 뭔가 찜찜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항 검역소에서는 언제 자기들이그랬나고 시치미를 떼기 시작했다. 화가 치밀었다.<국내 검역관 불친절에 ‘씁쓸’>“나쁜놈들 아니여. 버섯은 다 아니까 그냥 물건만 갖고오라고 해놓고는이제와선 그런적 없다고 딴청을 부리더라구요. 있는대로 소릴 질러대고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지.” 권씨의 그 같은 행동이 약효가 있었는지 검역관들이 선심쓰듯이 검사증을 끊어 줬다.일단 1천5백개를 호주행 비행기에 실려보냈다. 현지 도착 후 금새 동이 난버섯은 일주일만에 3천5백개의 주문으로 이어질 정도로 대호평이었다. 다음수출을 위해 재배 현장 검증을 다시 부탁했다. 이번에도 공항 검역소에서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2번째 수출도 실사도 하지않은 상태서 공항 검역소에서 검사증만 받고 이루어졌다.“내가 괜히 법을 어기는 꼴이드라고. 안되겠다 싶어 이번에는 김포공항검역소가 아니라 청주검역소에 연락을 해서 난 법대로 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직무유기하지 말고 빨리 현장 검증을 해달라고 했습니다.”청주검역소 소장이 달려왔다. 그간의 일을 사과하면서 꼼꼼히 필요한 검사서류를 만들어 줬다.“공무원 행동 하나하나가 농민에게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연못속에 돌던지는 어린애와 그때마다 죽을 지경인 개구리하고 똑같은 이치여유.”지금까지 모두 3번에 걸친 수출. 7천여개 정도가 팔려나갔다. 권씨는 좀더적극적인 수출 방법을 고안했다. 호주 시드니에 운주팜(Woon Joo Farm)이라는 유통법인을 세웠다. 바이어를 상대로 하는 교역의 경우 신용장 개설이다, 계약서다, 농사만 지어온 권씨에게 오히려 익숙치 않은 방법이기 때문이다.또다른 이유는 현지 소비자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다.“농산물수출이 어렵다고들 하지요. 이는 뭐가 어려운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립니다. 저만 하더라도 수출은 해야겠는데 어디 한군데 조언하는 곳이 없더군요. 도에서 압니까, 군에서 압니까. 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만 하는게 우리 현실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현지법인 설립, 공장건설 계획도>팽이버섯 수출에 자신을 얻은 권씨는 또 다른 계획이 있다. 수요량이 일정한 수준이 되면 현지 공장을 설립하는 것이다. 꿈이 아니다. 벌써 공장부지도 사들였고 군복무중인 아들이 제대하면 결혼시켜 10월쯤 호주로 보낸다는결정도 내렸다. 이미 예비 며느리감은 권씨 버섯사에서 버섯재배기술을 익히고 있다.또한 팽이버섯이 어느정도 자리잡으면 우리나라 전통식품을 호주에서 생산판매해야겠다는 미래설계도 그려놓고 있다.권씨는 오는 20일 또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동안 보내진 버섯이어떻게 팔려나가고 있는지, 부족한 점은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국내에서 팽이버섯의 최고였듯 호주에서도 ‘운주농산의 버섯은 최고의 팽이버섯’이라는 칭호를 얻겠다는 의지가 호주들녘에 꿈틀댄다.<박금연 기자>발행일 : 98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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