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 <가을-이정예>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덕수궁의 앞뜰 정경은 여전하다.참으로 오랜만에 덕수궁 벤치에 앉았다. 바람에 가랑잎이 우우우 담장 밑으로 몰려간다. 한해동안 온갖 바람에도 나무를 지켜주던 푸르던 나뭇잎들은 바짝 마른 제 몸조차 나무의 거름이 되어 주면서도 그 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말없이 자연으로 돌아가 또다른 푸른잎을 준비한다.14년전, 나는 덕수궁 앞을 종종걸음치던 직장인이었다. 도시의 권태를 털어내기 위해 산에 자주 다니던 나는 강원도 산골에 매료돼 산촌새댁이 되었다.내가 살게된 곳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하늘이 손수건만하고 사방이 산으로병풍처럼 둘러쳐 있으며 길에는 모난 자갈이 걸을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벽촌이었다. 그곳에 살면 영원한 캠핑을 할 수 있을 것같은 기대감에서 시작된 선택이었다.유치한 빛깔의 벽지조차 유치함으로 아름다웠다.농촌사람들이 잡초라면서 천대하는 망초대꽃과 새벽달빛에 피어난 달맞이꽃이 오랫동안 내 방안으로 초대되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햇솜과도 같은유치함들은 소는 일년에 한마리씩 송아지를 낳지 않는 사실을 깨닫게 됨과동시에 조금씩 줄어들게 되었다.우리의 전재산을 모아서 기르던 여덟마리의 한우는 한우값 파동으로 네마리의 젖소로 바뀌고 말았다.강원도, 그 푸르름만큼 돌도 많았다. 돌이 끝도 없이 솟아나던 자갈밭을 우리는 맨손으로 일구었다. 밤이면 손마디가 욱신거려서 깊은 잠을 못이루었다.우리의 무모하고 고된 작업은 아이들의 태어남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작은 벌레들과 풀과 나무들의 이름을 먼저 알게 되고거친 생활속에서도 맑고 천진스럽게 커가는 아이들이 우리 내외에게 있어커다란 안식이었다. 아이들이 자작자작 걸음을 걷게 되었을 쯤, 우리는 넓고 커다란 밭을 갖게 되었다. 그 척박했던 묵정밭이 이제는 비료 한 톨 넣지 않아도 검푸른 옥수수를 키워내는 옥토가 되었다.우리의 애타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축산 불경기는 불투명하게 오래 지속되었다. 계속되는 소값 파동과 고름우유 사건, 절박 소 유통, 축산폐수 등의문제 등이 어려운 축산인들의 발목을 잡아 흔들었다. 그래도 남편은 끝없는투자를 고집했다. 톱밥 발효운동장, 정화조 시설, 과학적인 착유 시스템을도입하며 부부관리형 목장으로 시설을 갖추어 나갔다. 무모한 경지정리사업은 내 고향, 서울로의 회귀에 대한 희망을 뭉텅뭉텅 잘라 버렸다. 가느다란희망이 있던 곳에 포기와 오기가 들어섰고 나는 참 농사꾼을 닮아가고 있었다.꽃무늬가 수놓인 분홍 양산이 농속에서 빛을 잃었다.진달래가 산에 점점이 불을 놓고 마을로 내려서야 봄인줄 깨닫게 되는 고된 삶이 십여년 거듭되면서 80여마리의 소와 4동의 축사를 갖게 되었다.우리의 아이들이 벌써 사춘기를 맞았다. 어제는 큰 아이가 제 이마에 솟아난게 뭐냐고 이마를 들이댔다. 그리고 암만해도 코 밑에도 수염이 날려고까만게 난 것 같다며 수선을 떨었다.시골 중학교에 다니는 큰 아이는 유난히 정이 많다. 착한만큼 공부도 잘했으면 좋겠는데 장난이 더 심하다. 그러나 중간은 넘으니 밉지는 않다. 초등학교 때 3년간 피아노를 배운 덕으로 리코더를 훌륭하게 연주하는데 설겆이할 때 아이들 방에서 울려나오는 자연에 가까운 음색의 이중주는 작은 음악회를 만든다.무슨일에든지 적극적이며 목장일도 힘써 거들 줄 아는 아이들은 남들과도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인이 될 것이다. 지식을 많이 쌓는 일보다 마음을키우며 이웃과 정을 나누는 아이들은 자연속에 동화되어 따뜻한 고향을 마음에 갖고 있을 것이다.때로는 자기 재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적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실개천이 에돌아 흐르고 새벽이면 화장실 창문 위에서 후티티가 노래하는 고향집을 갖게 될 일이 더 감사하다.나는 요즘 새벽착유를 하면서 큰 교훈을 얻게 되었다.겨울 배추는 유달리 달고 맛있다.그러나 지금껏 겨울배추가 왜 달까를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만물이꽁꽁 언 새벽 오두마니 옹동그리고 있는 배추포기를 보며 그 단맛이 결코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얼었던 제 몸을 가을볕에 은근히녹여 그 속을 키워내고 견딘 결과인 것을 사십의 나이를 얻고야 알았다.틈틈이 가꾼 배추들이 나날이 튼실해지고 있다. 이 가을을 보내며 자기만의 인내로 단맛을 얻어내는 겨울배추의 교훈을 내 삶속에 저장해 본다.저 혼자 부글대다 익은 술이 더 향기롭듯이 우리 농촌도 지금의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다.지금이 가장 어려운 때다. 지금의 난관을 극복해내는 농민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해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농자천하지대본은 옛날말이 아니다. 모든 생명은 흙에서부터 비롯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다. 나는 농민이 존경받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이 가을 나 역시 내 가족과 이웃들에게 진정한 낙엽이 되고 싶다.<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도곡리 304-5>발행일 : 97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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