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전남 무안

[한국농어민신문]

전남 무안의 경신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준 ‘마을 음악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인 마을 음악회에서는 택호나 이름 대신 별명을 부르는 규칙이 있다.
전남 무안의 경신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준 ‘마을 음악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인 마을 음악회에서는 택호나 이름 대신 별명을 부르는 규칙이 있다.

결혼 후 살게 된 시댁 마을은 읍내에서 멀지 않는 곳이었다. 집들은 빈 꼬막 껍데기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마을 안의 거의 모든 집은 외벽이 퇴색하고 담장이 허물어져 궁색해 보였다. 마을 진입로에는 순우리말로 ‘살사리꽃’이라고 하는 코스모스꽃이 듬성듬성 피어 왜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을 받아보지 못한 꽃 같았다. 길을 오가며 어지럽게 쓰러진 코스모스를 볼 때마다, 사람이나 꽃이나 한 모양이네, 하는 푸념이 흘러나왔다.

시어머니가 제일 겁내는 것은, 내가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공동 우물터에서 빨래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사람들이 없을 때 혼자 빨래하기를 원했다. 시어머니가 마을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구는 간신처럼, 오늘은 이 사람하고 얼굴 맞대고 웃다가 내일은 저 사람이 술을 사 주면 저리 붙어 희희낙락하니 몹쓸 사람이라는 거였다. 나중에 보니 당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마을 안에는 농토가 별로 없고 뒷산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빈부의 차가 심해 생활보장대상자가 많았다. 인근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다고 소문이 난 마을이었다. 그런데 마을 내부 상황과 다르게 자연경관만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을 이름도 품격이 있었다. 서울 ‘경(京)’ 자를 써서 ‘경신동’이었다.
마을 전체가 정남향이다 보니 햇빛만은 넉넉했다. 온종일 햇빛이 가득한 동네였다. 아무리 많은 눈이 내려도 햇볕이 쬐기만 하면 눈이 빠르게 녹으면서 마을 풍경이 드러났다. 그런 자연조건 덕에 집마다 푸른 대나무가 한쪽 모퉁이를 차지하고 자랐다. 타지를 돌다가 마을 안으로 들어설 때 높이 나풀거리는 댓잎을 보면 푸른 깃발처럼 마음이 출렁거렸다.

바람에 댓잎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다 보면 바다가 떠올랐다. 그 소리는 사그락사그락, 몽돌 구르는 소리 같았다. 빗방울이 대밭 속에 떨어지는 소리는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소곤소곤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시사철 푸른 잎을 볼 수 있어서, 때로는 마음 안에 환한 기운이 번지곤 했다.
마을 대숲은 새들의 은신처요 보금자리였다. 가을걷이가 끝날 즈음, 새들이 우리 마을로 모여들었다. 한 무더기의 새들이 포르릉거리며 몰려다니는 모습을 한참 넋 놓고 바라보곤 했다. 하루가 시작되는 이른 아침이면 맑은 새소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험담하고 살아도 마을 안에 있으면 이불에 담긴 몸처럼 포근했다. 경관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삶까지 평화로울 수 있다면 꿈의 낙원이 되겠지 싶었다. 그렇지만 세상살이라는 것은 뭔가 하나쯤 기울거나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싸움 걸어야 하나
마을 사람들, 벼루고 사는 것 같아
조카와 작은아버지가 몸싸움하기도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 들어온
6·25 한국전쟁 ‘역사의 상처’가 이유

살림은 다들 옹색했다. 일거리가 없으니 넘쳐나는 것은 시간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오늘은 무슨 일로 싸움을 걸어야 하나, 벼루고 사는 것 같았다. 비 오는 날이면 시간이 많은 탓인지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명색이 자작일촌인데,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보다 더 못했다. 조카와 연로하신 작은 아버지가 몸싸움하는 날도 있었다. 시어머니 역시 당숙모와 철천지원수가 따로 없었다.

마을은 몇 파로 나뉘어 끼리끼리 어울려 다녔다. 자신의 편이 아니면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할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상대편 주장은 무조건 손사래를 친다거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기 일쑤였다. 누구는 지나가는 길을 농기계가 막았다며, 집에 있는 자기 농기계를 끌어와 길 한 가운데 놓고 가는 심술을 부렸다. 바쁜 농사철에 길이 막혀 발을 동동 구르는 일도 많았다. 마을은 조용할 날이 거의 없었다. 마을 회관도 필요가 없어서, 인근 공사 현장 인부들에게 세를 놓았다.

유일하게 젊은 사람이었던 현이 아빠는 마을 안의 거친 분위기를 걷어 내겠다며 매사를 양보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했고, 작은 일거리라도 만들어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더니 싸움밖에 모르는 사람들과 상종하기 싫다며 갑자기 이사를 가버렸다. 
한 가닥의 희망을 걸었는데, 떠나버린 현이네 빈집을 보며 한동안 우울했다. 이제 마을의 변화는 멈춰 버린 것이 아닌가 싶으니, 내 안의 기력이 빠져나간 듯했다. 몸과 마음도 휘청거렸다. 마을 안의 부정적이고 대립적인 감정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본인들 스스로가 이런 마을 구석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비난을 일삼았다. 하늘을 보고 침 뱉기였다.

이웃집의 복자 씨는 친정집에 오면 이틀째 되는 날쯤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이런저런 안부 인사를 하고 끝자락에는 친정 마을 험담을 했다. 오죽했으면, 이 마을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당신은 젊으니 웬만하면 도시로 나가 살라고 했다. 생각해서 하는 소리겠지만,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복자 씨 말대로 나마저 가버리면 이 마을은 영원히 사람 살 곳이 아닌 채 남겨질 것이 뻔했다.

이 마을의 분위기가 악화한 원인은 분단 역사의 상처 때문이었다. 6·25 한국전쟁 때,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다. 오로지, 어느 편에 서야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전전긍긍하는 평범한 농투성이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이데올로기 때문에 마을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해버렸다.
바깥출입을 자주 했던 시할아버지는 집안에서 생활하면 위험했다. 가족들은 콩잎이 우거진 산비탈 밭에 시할아버지를 숨어 있도록 했다. 어느 날, 인민군이 들이닥쳐 총부리를 들이대며 시할아버지의 행방을 물었다. 그런데 건너 고샅에 사는 작은할머니가 그 콩밭을 손가락질로 가리켜 버렸다. 시할아버지는 그 즉시 생죽음을 당했다. 작은할머니는 그 죄책감 때문에 우울해하다가 세상을 달리했다. 한 집안에 줄초상이 이어졌다.

그런저런 비슷한 사건 때문에 마을 안은 감정대립이 심각한 상태였다. 마을의 가구 수는 친정 마을의 3분의 1도 안 되었지만, 마을 사람들 사이에 얽힌 감정은 거미줄처럼 복잡했다. 마을 안은 불신과 반목의 거미줄이 얼기설기 뒤엉켰다.
마을 공동체가 무참히 깨지고, 믿음과 신뢰가 실종된 세월이 계속되었다. 마음을 꼭꼭 닫아건 문빗장은 녹이 슬 정도였다. 한번 깨진 장독이 원 상태로 돌아오기 힘들 듯, 사람들은 반목과 질시를 일삼으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마을에 대해 알아 갈수록 불안한 마음이 쌓이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마치 기둥이 썩어가는 폐가를 속절없이 지켜보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편이 아니면 인간이 아니니까 상종하기 싫다며 이웃 마을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누군가 나서서 원칙과 윤리마저 심하게 뒤틀린 마을 분위기를 바로잡으려고 하기는커녕, 어쩌면 그런 분위기를 험담하고 조롱하며 즐기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이장직을 맡게 되었다. 남편은 마을 분위기를 되돌리기 위해 과거 역사 비우기와 주민 단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호응하기는커녕 오히려 비난을 일삼거나 훼방 놓기까지 했다. 남편은 일 년도 못 되어 진저리쳤다. 마침내, 읍사무소를 찾아가서, 사람들이 무능한 이장이라고 비난한다는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나와서 자신도 배알이 뒤틀렸으니까 언젠가는 맛을 보여주겠다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했던가. 어른들이 마주치기만 하면 상대를 험담하고 반목과 질시를 일삼다 보니 내 아이들도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것 같았다. 당숙네 비닐하우스에 못자리판을 만들었던 적이 있는데, 내 아이 둘이서 그 어린 모를 줴뜯은 사건이 벌어졌다. 당숙모가 찾아와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나는 아이들을 무작정 꾸짖기 전에 그 이유부터 물었다. 일전에 당숙모와 시어머니가 고함을 치고 삿대질하며 싸운 적이 있었는데, 복수심이 생겨서 그렇게 줴뜯었다는 거였다. 순수하고 맑게 자라야 할 아이들이 어른들의 싸움에 영향을 받아 복수를 생각했다는 기막힌 현실 앞에서, 겁이 더럭 났다.

한 아이를 키울 때 온 마을의 힘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다. 한 마을의 힘이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종달새의 날개, 따사롭게 내리쬐는 볕, 하늘 위에 펼쳐진 구름 모양, 빗소리, 산그늘, 강아지의 몸짓 하나까지도 포함된다. 그런데 마을 분위기가 엉망진창이라서 아이들도 어른들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의 눈을 억지로 가린다거나, 어른들은 ‘바담 풍’이라고 발음해도 너희들을 ‘바람 풍’으로 옳게 말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흐르는 물길이 잘못되었을 때, 바라보고 있기만 하면 그 물길은 영영 그대로 지속할 수밖에 없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잘못된 물길을 바로잡아야 했다. 나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인심이 화합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건 내 혼자만의 각오나 힘으로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화두는 ‘용서와 화해 그리고 화합’이었다.

난마처럼 뒤엉킨 가닥 풀기 위해 
먼저 이해하고 사랑 베풀기 노력
추석 ‘알콩달콩’ 음악회 개최 시작
방송 출연, 연극·문집 제작 등 앞장
마을 사람들 하나로 뭉치는 변화

나는 난마(亂麻)처럼 뒤엉킨 가닥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며 고민했다. 마침내 결론이 났다. 내가 마을 사람들부터 사랑과 신뢰받으려면,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먼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마을에 사랑과 신뢰가 쌓이면 해묵은 갈등이나 반목과 질시도 사라질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었다.
사랑과 신뢰의 꽃이 피는 마을은 그저 평안과 행복한 분위기만 감도는 것이 아닐 터였다. 사랑과 신뢰는 그런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서 마을의 미래를 향해 모두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줄 터였다.

나는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 편 사람이든 따지지 않고 먼저 인사하기부터 실천했다. 농사일은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도왔다. 그런데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아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마지못해 웃음을 띠곤 했다. 무논에 경운기가 빠져서 꼼짝 못 하고 있을 때도 제일 먼저 달려갔다. 온몸이 펄투성이가 될 정도로 애써서 도와주자 마을 사람들의 굳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기색이 보였다. 읍내 나갔다가 돌아오는 마을사람들을 내 오토바이 뒤에 태워 집으로 모셔드렸다.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질 때면 이웃들이 말리고 있던 벼, 깨, 고추를 함께 거둬들이는 데 앞장섰다. 
옆에서 내 행동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남편이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동참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동참은 그 어떤 것보다 나에게 힘과 용기를 그리고 확신을 안겨주었다. 

내친김에, 시어머니께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도와주기를 부탁했다. 시어머니의 태도는 완강했다. 철천지원수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상종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와 마을 사람들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자, 시어머니의 마음도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반목하고 질시했던 사람들과 눈인사라도 나누기 시작했다. 또 그들도 부드럽게 나오자, 미소를 띠기도 했다. 바이러스 중에서 가장 전파력이 뛰어난 것은 ‘사랑과 행복 바이러스’가 아닐까. 아무튼, 우리 집안과 이웃들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원만해졌다.
하지만 마을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우리 집과 다른 이웃들 사이만 원만해지기 시작했을 뿐이지, ‘끼리끼리’라는 파벌 의식은 여전히 존재했다. 해묵은 감정과 앙숙 관계를 쉽게 치유할 묘수는 찾아내기 힘들었다. 나는 이웃들을 이해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 계획을 세웠다.

마을 어르신 중, 당숙은 술을 좋아해서 호탕한 기질이 있었으며 옳고 그름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런데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당숙은 나를 신뢰하긴 했어도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다. 나는 시어머니와 당숙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며 많은 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숙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마을의 파벌 싸움을 종식하지 못하면 고사성어에서 나오는 ‘양패구상(兩敗俱傷)’처럼 서로 손해를 입게 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당숙의 마음이 움직였고,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마을 어르신들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겨울이 되면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담벼락 곁에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해바라기를 했다. 그런데 끼리끼리 모여서 노는 것은 여전했다. 나는 짬이 날 때면 이 패나 저 패를 가리지 않고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발견한 것이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서로 택호를 부른다거나, “김 가야!” 혹은 “이 가야!” 하고 부르지 않고 별명을 부른다는 사실이었다.

키와 체격이 좋고 목소리가 우렁찬 어르신의 별명은 ‘양철’이었다. 그 어르신은 어디를 가나 주변을 시끄럽게 한다고 했다. ‘우두거니’ 어르신도 있었다. 그분은 누군가가 불러도 대답을 잘 하지 않았다. 연세가 있어서 난청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고 젊어서부터 그랬다고 했다. ‘늴리리’는 노래 부르기 좋아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복자 씨 아버지는 ‘짱뚱어’. 어머니는 ‘윤 형사’였다. ‘짱뚱어’ 어르신은 밤낮 ‘마실(마을)’을 돌며 술 마시기 좋아하느라 얼굴 피부가 검게 탄 데다가 눈알이 약간 돌출되어 그런 별명이 붙었다. ‘윤 형사’는, 그처럼 술 마시며 싸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남편을 잘 찾아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당숙의 별명은 ‘삐쭉새’였다. 조금만 비위가 뒤틀리면 입술을 삐쭉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시어머니는 일 욕심이 많고 남 재촉하기를 잘 해서 ‘비행기’였다.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비위가 틀어지기만 하면 우물가로 가 온갖 통을 판다고 해서 ‘뗑깡쟁이’였다.

서로 그런 별명을 부르는 것이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 또, 서로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밑바탕에 친근과 애정이 아직 살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서 희망적이었다. 그런데 타지에서 시집온 나만 유독 별명이 없어서 서운했다. 어르신들과 친근해지고 싶고 또 부러움을 못 이겨서 별명 하나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별명이 생겨야지 마을의 정식 일원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양철 어르신이 나섰다.
“고무신 별명은 어때?”
“왜요?”
“대하기 편해서 고무신이요, 마을 구석구석을 열심히 돌아다니기 좋아하니까 고무신이지.”
옆에 있던 어르신들이 그럴싸하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그 별명이 싫지 않았다. 고무신은 어릴 때부터 즐겨 신어서 친근감을 느꼈다. 운동화와 고무신은 느낌이 달랐다. 운동화가 외출이나 여행을 떠올리게 만든다면, 고무신은 뭔가 해야 할 일거리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당장이라도 고무신으로 갈아 신고 마을 분위기 쇄신을 위해 고샅마다 뛰어다닐 희망과 용기가 용솟음쳤다.
“감사합니다.”
“어딜, 맨입으로 감사하다고 말만 하면 되나. 작명 값으로 노래 한 곡 뽑아야지.”
‘어, 이런!’ 하고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치면 어르신들과 언제 가까워질지 모를 일이었다. 잘 부르지 못하는 노래였지만, 어르신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뽕짝’ 한 곡을 뽑았다. 노래를 부르자, 삼삼오오 흩어져 해바라기를 하던 어르신들이 뭔 일인가 하며 내 옆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 노래가 끝나자마자 답가를 하겠다며 ‘늴리리’ 어르신이 잽싸게 나섰다.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얼씨구나, 이때로구나.’ 했을 터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그 노래가 흘러나간 뒤에 누군가가 노래를 또 불렀다. 또 누군가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장구를 꺼내왔다.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분위기가 변했다. 무장해제라고나 할까? 오랜 반목과 질시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살았던 사람들이 그 벽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나는 보았다. 어르신들은 노랫가락과 장구 장단이 흥에 겨워서 어깨를 들썩였다. 놀라운 변화였다. 하지만 노래판이 끝나자, 끼리끼리 흩어져서 해바라기를 했다.

일 년이면 한두 번씩 오던 복자 씨는 마을 분위기가 많이 변한 것 같다며 그 이유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더니, 그녀는 눈길을 멀리 두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리고 마을을 위해 쓰라며 자신이 모아 둔 통장을 내밀었다.
“마을에서 작은 음악회를 개최하는 건 어때요. 음악은 인심의 화합이라고 하거든요. 학교 대항 경기가 벌어질 때 교가를 부르면 전교생이 하나로 뭉치게 되잖아요. 우리도 하나가 되면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거예요.”
좋은 제안이었다. 나와 복자 씨는 밑지는 셈 치고, 마을 사람들에게 추석날 작은 음악회를 개최하는 게 어떻냐고 물었다. 기본 경비는 복자 씨가 내놓은 통장에서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저마다 음식 한 가지씩 장만해서 가져오겠다는 거였다. 시어머니는 동동주를 담가서 내놓기로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객지에 나갔던 자녀들이 작음 음악회 소식을 듣고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을 모아서 내놓기로 했다.

 

드디어 추석날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눠 먹을 주먹밥을 만들고 돼지 한 마리를 삶기도 했다. 읍장이 참석하기로 했고, 인근 마을 사람들도 구경 오겠다고 했다. 객지에 나갔던 자녀들이 다 모였다. 작은 음악회의 명칭은 ‘알콩달콩’ 음악회였다. 사회는 이장인 ‘뗑깡쟁이’ 남편에게 부탁했는데 극구 사양하여 ‘고무신’인 내가 맡기로 했다.
알콩달콩 음악회 무대는 마을 회관 앞 공터에 팔레트를 놓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았다. 보잘것없는 무대였으나 우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허심탄회한 자리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노래 부를 수 있었고, 마을 발전을 위한 제언도 가능한 자리였다. 마을 사람들 모두 주인공인 음악회였다. 단 하나, 규칙을 정했는데 택호나 이름 대신에 별명을 부르기로 한 거였다.

읍장은 인사말에서, 싸움닭 같던 사람들이 일냈다며 정부 지원금 없이 자체적으로 주민들이 주인공이 되어 음악회를 여는 것은 아마도 처음일 거라고 했다. 복자 씨가 무대에 올라서 자작시를 낭송했다. 시 제목은 ‘우리 마을에 삐쭉새가 산다’였다. 시 속의 ‘삐쭉새’가 누구의 별명인지 모두 알고 있어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노래를 부르려고 제일 먼저 무대로 뛰어오른 사람은 역시 늴리리 어르신이었다. 그동안 여기저기를 가리지 않고 갈고닦은 노래 솜씨를 유감없이 펼쳤다. 이에 질세라 복자 씨 아버지인 짱뚱어 어르신이 무대에 올라 육자배기를 뽑았다. 마을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육자배기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마력을 지니기도 했다. 

우두거니 시숙도 그날만은 달랐다. 평소에는 남들의 언행에 별로 반응하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고개를 돌리거나 어깨춤을 추어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육자배기가 끝나자, 양철 어르신이 우리 지역, 일로에서 크게 번창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품바타령’을 불렀다. 복장이나 얼굴 화장이 완벽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설픈 준비가 오히려 소탈했고, 또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음악회 전반부가 남자 어르신들의 무대였다면, 후반부는 여성 어르신들의 독무대였다. 별명이 ‘바작(발채)’인 당숙모가 숨겨놓았던 노래 실력을 몽땅 털어놓았다. 시어머니가 담가서 내놓은 동동주를 마신 효력인 듯 싶었다. 당숙모가 예전 같았으면 시어머니가 내놓은 동동주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두어 대접을 연거푸 들이키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때, 나는 ‘비행기’ 별명을 가진 시어머니의 눈치도 살펴보았다. 당신이 만든 동동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당숙모를 흡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복자 씨 어머니인 ‘윤 형사’의 노래 솜씨도 만만치 않았다. 이난영 가수의 ‘목포의 눈물’을 어찌나 구성지게 불렀던지, 누군가가 ‘비행기’ 별명을 ‘카수’로 바꾸자는 말을 할 정도였다. 

알콩달콩 음악회 막바지에 이르자, 자리에 그냥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일어서서 춤을 추거나 노래를 따라부르며, 하나의 거대한 원(圓)으로 변했다. 복자 씨의 말마따나 음악은 인심의 화합이라고 했는데, 해묵은 갈등과 반목과 질시가 거대한 원이라는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아버렸고, 급기야 하나가 되어 저마다 아름다운 꽃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한가위 보름달이 마을 안을 가득 채우고 대나무들이 지킴이처럼 둘러섰다. 그 순간, 마을에는 별빛과 가을벌레 소리도 깊숙이 스며들었다. 꽃은 어울려 피면 더욱 아름다운 법이었다.

 

음악회가 열린 이후, 우리 마을 소식이 외부에 알려지자 KBS한국방송 ‘열린 마당’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그날 방송 제목은 ‘별명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흉이 복이 됐다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방송 출연 후, 친지와 자녀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오일장에 나갔다가 축하한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한동안 들떠서 지내기도 했다. 그날부터 시작된 작은 음악회는 해마다 연중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유명해진 덕에 유입인구가 늘어 마을 규모가 커지기도 했다. 

2017년에는 우리 마을에서 ‘인생극단’이란 연극도 올렸다. 마을 분들이 연로해 생각처럼 쉽지 않아서 주춤거렸는데, 마을로 이사 온 새 가구 중에 연극 활동을 했던 사람이 있어서 무난히 공연할 수 있었다. 2019년에는 마을 문집을 발간했다. 어르신들은 당신의 인생사를 다 적으려면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하다고 했다. 저녁 시간을 이용해 마을 회관에 모여 구술 작업을 했다. 그 문집 속에 마을 사람들의 울고 웃는 이야기를 담았다. 자녀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가슴 아픈 이야기도 넣었다. 2022년에는 전라남도 마을 공동체 사업이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재, 마을 사회적 기업을 추진 중이다. 지난 7월에는 사회적 기업에 관련된 교육을 받았다. 20%의 자부담이 부담스럽기는 하나 마을 공동 소득 창출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는 변화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동구에 ‘경신동’이라는 동명을 적은 표지석을 세웠다. 당산나무 위에 마이크도 설치했다. 마을 진입로와 안길에 메밀꽃 씨를 비롯하여 각종 꽃씨를 뿌렸다. 특히, 메밀꽃은 하얀 쌀이 흩어진 듯 무더기를 이루어서 장관이다. 달밤에 보는 메밀꽃밭은 더 장관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저마다 예쁜 꽃으로 피어 있는 상황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을 것이다. 안치환 가수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노래했다. 우리 마을 ‘사람꽃’은 저마다 개성 있게 피지만, 어울려 함께 피어나서 더욱 아름답고 소중하다. 낙원이 따로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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