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식/농부. 마음치유농장 대표

30년 작가 생활 중 첫 수상록
당도한 삶의 이정표 드러내며
신성 향한 시인의 시선 돋보여

생을 버티게 하는 문장들 (박두규. 산지니. 2017. 3. 1만3000원)

오늘, 비 온 뒤에 햇빛을 받은 풀잎이 싱그럽다. 밤사이에 새하얗게 꽃망울이 터진 찔레꽃. 봉곳봉곳하게 부풀어 오른 개망초 꽃망울들. 꾸밈없이 꾸며진 5월의 산천은 온통 한 편의 시다. 시심이 절로 난다.

대자연처럼 꾸밈없이 사는 시인들의 시가 떠오른다. 시를 읽고 감동했으면 절대 그 시인을 만나지는 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시인들은 예외다. 시처럼 감동을 주며 살아가는 시인들이라 그렇다.

<생을 버티게 하는 문장들>의 부제는 ‘외로운 당신에게 건네는 생명의 메시지’다. 한
편 한 편 그의 글은 외로움을 떨치고 생명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시인 박두규가 그의 30년 작가 생활에서 처음으로 내는 수상록이다. 시어로 담지 않았던 일상을 풀어쓴 이 책에는 그의 주변 인물들이 개성 있게 등장한다.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60년대 풍경도 있다. 시의 자양분인 자연과 사회관계가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 자전거는 손수건으로 싼 도시락이 매달려 달그락대고, 술도가 배달꾼 춘풍 어른 짐바리 자전거에서는 술 냄새가 풍겼다. 조합장 아들 빨간 세발자전거는 또래 친구들을 꼼짝 못 하게 했다(89쪽 요약). 자전거 한 대, 리어커 한 대가 시골에서는 부의 상징이었던 시절 이야기다.

나도 잘 아는 고 박영근 시인과의 일화는 박영근 시인의 풍모를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소환한다. 가난, 풍류, 대 자유, 노동자 문학으로 상징되는 박영근의 죽음은 ‘한 시대의 퇴장’이라고 불렸다. 박두규는 그와의 일화를 ‘시인의 전화’에 담았다. “…지금도 갈 곳이 없다는 시인의 말은… 슬픔의 그림자까지 따라온다.”전교조 활동가였던 박두규는 여순사건시민연대와 한국작가회의 이사,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장 등 문학의 사회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제도나 시스템의 개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 시집의 마지막 장인 제3장 ‘내 안의 신성, 오직 그대뿐’은 시인이 당도한 삶의 이정표를 잘 드러내고 있다.

30년, 40년을 감옥에서 산 한국의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모시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시인의 소회를 보자. 시인은 그 흔한 독재정권, 인간승리, 양심 등을 거론하지 않는다.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모습에서 관대함과 겸손함과 고마움과 부드러움이 돋보였다고 기록한다. 그것이 혹독한 수감생활과 전향 공작 고문을 이겨 낸 힘이 아닐까 싶다(143-146쪽). 인도의 ‘부단 운동’ 선구자 비노바 바베에 대한 회상도 같은 맥락이다.

책에는 나랑 같이 한 달을 남미 여러 나라를 다녔던 명상여행 이야기도 있어 더 반가웠다. ‘남미에서의 바바남케발람’이 그것이다. 현지 음식 한 끼, 술 한 방울 안 먹고 수행자가 되어 한 외국 여행은 아마도 외국 여행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다. 시인의 시선이 확실하게 신성을 향해 있다는 흔적들로 보인다.

 

같이 보면 좋은 책

산 자들 가슴 울리던 시인의 호곡

아주 오래전에 도법스님과 전국을 걷는 탁발 순례 때 만난 김유철 시인은 섬세하기가 비단결 같으나 명철한 시대정신은 장독대 정화수 같다.

산이 바다에 떠 있듯이(김유철. 불휘미디어. 2021. 5. 1만5000원)

민예총, 민언련, 가톨릭문협 활동을 하는 시인 김유철은 최근작 <산이 바다에 떠 있듯이>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살아내기가 늘 어려웠다고. 사람이 시대의 길 속으로 걸어가듯 (자기의) 시도 시대를 비껴갈 수 없었다고. 그 시로 시대를 버텨 냈다고.

꽃과 그리움은 알아도 노동을 모르는 시인은 많다. 농사는커녕 손에 호미를 잡아 보지 않고도 농촌에 대해, 농업에 대해 시를 쓸 수 있다. 김유철은 농사도 알고 노동도 안다.

숯이 된 사람이 있다/한 사람이 가야 할 길은/온몸에 석유를 붓는 길이었다/…/40년이 지나도 그는 타고 있다/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이 즐비 했지만/…/전태일은 숯이다 빨간 숫덩이다(85-86쪽 ‘숯덩이’ 요약)

또 다른 작품인 ‘일어나소서’(238쪽)는 고 백남기 농부를 향한 사모곡이다. 이영희 교수, 고승하 가수. 노무현 등의 이름 위에서 시인의 시대는 질박하게 흐른다. 세월호도 시인이 머문 곳이다.

꽃이 된 아이들/별이 된 아이들/끝내 눈물이 된 아이들/…/요리사가, 디자이너가, 경영자가, 연예인이, 군인이 되고 싶었던 이이들/…/산 자들의 기억과 다짐 속에/노란 바다에 별빛 내린다.(‘오늘도 노란 바다에 별빛이 내린다’)

광화문의 추모제와 팽목항에서 산 자들의 가슴을 울리던 시인의 호곡이 들리는 듯하다.


씨줄날줄 연결된 시인의 숨결

나는 못난이(서정홍. 보리. 2013. 5. 9000원)
나는 못난이(서정홍. 보리. 2013. 5. 9000원)

내 동갑내기 친구 서정홍을 동시 작가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동심에 빠져든다. <나는 못난이>가 어떻게 독자를 동심으로 이끄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의 마음이 동심 그대로여서 아닐까 싶다. 어떨 때는 서정홍과 얘기 나누다 보면 진짜 애 같기도 하다. 이 시를 보자.

할머니 어깨 두드리면 어구 시원하다/할아버지 뜨건 콩나물국 드시며 크으으 시원타/아버지 방귀 뀌고 카아 시원하다/형이 엄마한테 혼나면 와 내가 시원하다(‘똑 같은 말인데2’ 요약). 밥은 안 처묵고 텔레비만 볼 끼가?/피겨 여왕이 밥 멕여 주나?/피겨고 축구고 밥 먹어야 할 수 있다니까!/(70쪽. ‘밥상 앞에서’ 요약)

서정홍은 이렇게 독자를 어린이 상태로 만든다. 오래된 옛 추억 속으로 이끈다. 그렇게 하면서 오늘을 벌떡 생기 나게 만든다. 그의 시가 갖는 힘이다. 일하는 사람이 쓴 건강한 글이어서 그렇다.

<아내에게 미안하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등 그의 시집들은 죄다 그렇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따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숨결이 씨줄 날줄로 연결된다. 연결의 대상은 늙은이와 어린애, 도시와 농촌, 죽음과 삶 등 존재 모두다. 96쪽의 ‘플라스틱 바가지’가 대표적이다. 짧디짧은 이 시에는 근검절약. 죽음. 햇볕. 할머니와 젊은것들. 날씨. 마당 수도 등이 다 담겨 있다. 한 몸처럼.

그가 운영하는 합천의 ‘담쟁이 인문학’의 초청으로 강연을 하고 시인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온 적이 있다. 돌아오는 내 손에 시인이 그곳 자연을 쥐여주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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