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범 여민동락공동체 대표

[한국농어민신문]

젊은이들이 남고 싶은, 오고 싶은 농촌을 만들겠다는 뻔한 그들의 레토릭을 넘어 현실에서 구현하는 방법을 만들고자 오늘도 마음속 냉탕과 온탕을 오고 간다. 결국 뜻 있는 지역 공무원과 주민들의 도움과 배려, 공동체 식구들의 손을 거쳐 세 식구가 그럭저럭 살만한 집을 얻었고 남블리 부부가 열심히 단장하고 있다.
 

여민동락에 참 많은 사람이 오고 갔다. 사연도 각양각색이고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거주기간도 단 며칠부터 몇 년까지, 그 중 유독 생각나는 이들이 몇 있는데 농촌복지를 해보겠다며 찾아온 용기 있는 20대 여성들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여성들의 이주 시기는 모두 달랐지만 매번 지역 어르신들에게 인기만점이었다. 하나같이 밝은 인사와 따뜻한 미소가 일품이었고 다정한 말투와 붙임성으로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어르신들의 애정을 독차지했다.

“오메 여민동락은 어서 이렇게 존 선상들만 델꼬 온당가”하시며 신상털기에 도시에 살고 있는 아들들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이야기는 기본이다. 그때마다 감사함과 곤혹스러움이 교차했지만 이런 시골에 젊은 처자가 오는 일은 흔치 않기에 속 깊은 이 청년들은 하나의 통과의례쯤으로 여기며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곤 했다.

그런데 어르신들께 인기만점이라고 그들의 일상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모두 여민동락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들이지만 여민동락 초창기 좌충우돌 농촌살이에 합류했기에 그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장 살 집을 얻는 것부터 난관이었고 겨우 찾은 집은 사는 내내 습기와 곰팡이, 더위와 추위와의 전쟁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각오하고 왔지만 평생을 도시 아파트 삶에 익숙한 그들이었기에 주거환경이 열악한 시골주택에 살면서 지역 어르신들과 동행하는 일, 처음 만난 주민들과 함께 농촌복지를 도모하는 일, 시시때때로 주어진 농사일까지 그야말로 해 떨어지면 적막함 그 자체였던 이곳에서 하루하루가 고행이었다. 공동체식구들이 아무리 챙겨준들 그것을 감내하는 건 온전히 그들의 몫이다. 만면에 미소와 다정함으로 어르신들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던 그녀들이지만 정작 본인들이 수시로 겪었을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풀만한 변변한 공간도, 비슷한 또래도 없던 이곳에서 정작 청년시기에 누려야 할 즐거움과 수다는 늘 절제의 대상이었기에 우리는 그들이 떠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가장 먼저 왔던 여성은 4년만에 지역의 어르신이 소개해준 서울 자녀와 결혼을 하여 이곳을 떠났다. 당연히 모두가 그녀의 행복을 기뻐했으나 동시에 그녀가 겪었던 어려움과 마음 깊숙이 들었던 정으로 몇 날 며칠을 상심과 눈물로 보냈기도 했다. 이 사건(?)후 모두 결심했다. 다시는 보내지 않으리라. 그런데 다음에 온 멋진 여성도 복지교육현장에서 만난 이와 사랑이 싹터 4년 만에 이곳을 떠났다. 다른 여성도 이곳에서 만난 남성과 결혼을 준비 중이다. 물론 도시에 있다. 하하하 다들 어렵다보니 잠시 착각했던 것 같다. 내 자식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감히 몇 년 동고동락 했다고 욕심을 부리다니….

지금은 각자가 살고 있는 터전에서 종종 연락하고 찾아온다. 그때마다 미안하고 고맙고 별의별 감정이 교차하지만 시집간 동생이 찾아오는 마냥 기쁜 것도 사실이다. 처음 올 때와 차이점은 시간이 흘러 2명에서 3명, 4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당시 함께 했던 이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운다. 도시에서의 현재와 힘들었지만 우리가 공유했던 농촌의 삶이 주요 이야기 소재다. 뭐가 옳다, 그르다 할 순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향하는 곳은 늘 이곳이다.

도시에서의 아이 양육과 교육문제, 물질과 경쟁의 문화,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지향 등 도시에서 늘상 겪었던 고민의 반복과 어쩔 수 없이 순응하는 현재의 삶 대개 그런 것들이다. 물론 중간 중간 작은 학교 살리기가 성공하여 전남을 대표하는 농촌형 미래학교가 되어가고 있다는 둥 조만간 세워질 복합문화센터와 다양한 지역혁신사업 추진까지 이제는 돌아와도 그럭저럭 사람 살만하다고 암암리에 꼬시기(?)도 했다.

드디어 작년 초, 4년 전 이곳을 떠났던 서울 태생의 '남블리'라 불리던 그녀가 타지에서의 삶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8년 전 혈혈단신 여민동락의 문을 두드렸던 그 서울 처자가 이제는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다시 이곳으로 오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공동체 식구들은 대환영인데 약속이나 한 듯이 예전처럼 대놓고 기쁨을 표현하진 않는다. 처음 왔을 땐 외로웠을지 모르나 결정은 비교적 쉽게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뿐만 아니라 양 가족들을 이해시키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기에 그녀의 결정에 조용히 힘을 실어주려는 속내일 것이다.

그렇게 최종 결정 후 6개월 정도의 준비 끝에 얼마 전 이주를 했다. 그런데 또다시 발목을 잡은 것은 '집구하기'다.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멋쩍게 웃고 말았지만 한두해 나온 이야기도 아니니 그간 이런 저런 핑계로 이 문제를 손 놓고 있던 국가나 일상에서 만나는 책임있는 이들의 무사안일과 복지부동도 어지간하다.

얼마 전 “저출산 예산 13년간 143조원 다 어디에 썼나!”라고 일갈하던 어떤 의원의 말이 속 시원하긴 했지만 그 금배지들도 책임있는 이들의 1순위이기에 남 말할 건 아니다. 21세기에, OECD 회원국이라 자부하는 대한민국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한 최소한의 주거권마저 누군가는, 농촌에선, 젊은 시절 고된 경험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자격 정도로 취급하는 이 현실을 언제쯤 바꿀 수 있을까! 젊은이들이 남고 싶은, 오고 싶은 농촌을 만들겠다는 뻔한 그들의 레토릭을 넘어 현실에서 구현하는 방법을 만들고자 오늘도 마음속 냉탕과 온탕을 오고 간다. 결국 뜻 있는 지역 공무원과 주민들의 도움과 배려, 공동체 식구들의 손을 거쳐 세 식구가 그럭저럭 살만한 집을 얻었고 남블리 부부가 열심히 단장하고 있다.

아참. 남블리는 돌아오는 그녀의 애칭이다. 마음 씀씀이와 행동이 사랑스럽다며 당시 동료가 붙여준 것이다. 남블리의 귀환을 환영한다. 우리 더불어 재미나게 살아봅시다. 여민동락 식구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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