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나 청년농부·전남 구례

[한국농어민신문]

“죄송해요. 저희가 1월 한 달간 공방을 쉬기로 했어요. 2월에 뵐게요.” 목요일 아침이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평소 같으면 공방에서 문 열 준비를 하다 전화를 받았을 텐데, 1월의 나는 이불 속에 있다. 방학이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 두고, 농촌으로 내려오면서 농촌에서의 여유 있는 생활을 상상하곤 했다. 물론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쌓여 있는 업무와 신경 써야 하는 많은 관계들이 사라진 하루하루가 시간적인 면에서 자유롭긴 하다. 하지만 결코 더 여유롭지는 않았다.

농사일이란 것이 단순히 씨앗을 뿌리고, 돌보고, 거두는 단계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씨앗을 뿌려서 거두기까지, 작물이 자라는 기간에는 당연히 농부의 손이 바쁠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씨앗을 뿌리기 전과 수확 후에도 해야 할 일이 있음은 농사를 지어 보고서야 알았다.

작물을 재배하는 시간도 한 가지 작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키우면, 눈코 뜰 새 없었다. 초보 농부라 기술도, 장비도, 능력도 부족하니 농번기는 그야말로 ‘번-아웃’의 시간이었다. 농사일에는 주5일제가 없다. 주말이라고 작물에게 필요한 일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정하게 쉬는 날이 없다는 점이 직장 생활에 익숙한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농한기 덕분이다.

시설재배나 축산을 하는 농부들이 많아지면서 땅이 얼고 작물이 자랄 수 없는 겨울부터 이른 봄의 농한기라는 개념도 많이 사라진 듯하다. 하지만 노지 농사만 하는 나는 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주어지는 농한기가 있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쉰다는 가장 마음 편한 휴식기는 주말 구분 없이 일하는 내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됐다.

이번 농한기를 제대로 보내려면 매 주 목·금·토요일에 열고 있는 읍내의 농산물 공방을 닫아야 했다. 지난 한 해, 수해가 있었던 때와 추석을 제외하고 한 번도 닫지 않았는데 1월 한 달 휴업을 결정했다. ‘겨울 방학’이라는 공지를 했다.

겨울 방학을 하면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멀리 있어 못 만났던 친구들도 만나고, 음식점들을 찾아다니며 먹고 싶었던 음식도 먹고, 공연이나 전시도 보러 다니고 싶었다. 심지어 해외여행도 꿈꿨다. 하지만 코로나 시국이 끝날 줄 몰랐고, 방학을 앞두고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이 있을 정도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그토록 기다렸던 방학에 집에만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집에만 있어야 하는 방학이 억울하고 뭘 해야 할 지 몰랐다. 너무나 소중한 방학을 제대로 못 보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밭에 나가진 않더라도 집에서는 미뤄 놓은 일이 보일 테고 자연스레 또 일을 하게 될지 모르니 절대로 일은 하지 않는다. 돌아다닐 수 없으니 집에서 할 수 있는 교육·문화생활을 한다. 농번기에 자주 아팠던 몸을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보름 정도 집에서 이 세 가지 원칙을 지키며 지내다 보니, 몸과 마음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읽고 싶었던 책들을 마음껏 읽었는데, ‘일상적 삶을 위해 모든 여력이 다 소진되고 존재와 우주에 대한 경이감을 느끼고 근원적 질문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여가는 인생에서 꼭 필요하다’는 프리도 릭켄 신부가 표현한 여가의 중요성을 읽으면서 겨울방학이 주는 행복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가는 단순히 일에서 벗어나거나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는 기분 전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앎의 기쁨을 가지며 인격을 성장시키는 계기로 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현대인이 그러하지만, 특히 육체노동을 하며 주말이 따로 없는 농부는 휴식과 여가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농촌 사회에는 휴식과 여가의 시간이 농한기라는 특정 시기에 집중되는 농부들을 위한 요소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꽤 많은 교육 프로그램이나 문화 행사들은 주로 봄부터 가을까지 있다. 우리나라의 행정 업무시간표는 대체로 연 초에 시작돼 연 말에는 사업 정산과 보고를 마치는 것으로 돌아가니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시기는 농부들에겐 따로 시간을 내어 참여하는 것이 부담되는 농번기다. 여가를 알차게 누리고 싶어도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즐길 수 없는데,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긴 시기에는 참여할 수 있는 교육이나 문화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

나 홀로 독서와 영화감상을 하면서도 겨울 방학을 잘 즐기긴 했다. 하지만 농번기 내내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하지 못했던 교육·문화 행사를 통한 앎의 기쁨과 인격을 성장시키는 여가활동을 구례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도시까지 눈 돌릴 필요 없이 말이다. 농촌에서 도시와 똑같은 행정 시간표를 적용하기 보단, 농민에게 유용하고 의미 있는 여가용 활동을 그들이 참여하기에 적합한 시간표로 진행하면 어떨까?

회복한 몸을 서서히 움직일 때다. 달콤했던 겨울방학을 마무리하며, 벌써부터 다음 방학을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다음 방학엔 구례에서 내 여가를 충만히 채워줄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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