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원 개발사업 무용지물…주민이 만들어낸 ‘폐광촌의 기적’

[한국농어민신문 고성진 기자]

강원도 정선의 폐광촌인 고한 마을은 마을 가꾸기에 나선 주민들의 노력으로 마을 골목 전체를 호텔처럼 운영하는 ‘마을호텔18번가’로 변모했다. 주민들이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은 2021년에도 계속 된다. 사진은 마을을 방문한 이들이 골목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

정부 주도 각종 사업 불구
인구는 줄고 역효과만 양산
“남이 대신해 줄 수는 없구나” 
주민들 직접 마을살리기 나서

매일 쓰레기 청소부터 시작
골목골목 꽃심고 ‘페인트 칠’ 
흉물로 방치된 빈집 단장도

중국집·사진관·이발소까지…
각각의 상점들 통째로 연결
‘마을호텔 18번가’ 개장
어디에도 없던 마을 탄생


해발 700미터, 떠나버린 이들의 발자취 속에 온기를 잃어가던 폐광 마을이 주민들의 노력으로 ‘마을호텔’로 변모했다. ‘흥망성쇠’ 중 쇠퇴와 소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던 마을은 최근 3년 사이에 놀라운 변화를 만들고 있다. 변화의 중심에는 마을 주민들이 있다. 흉가 같은 빈집을 고치고 청소를 하고 꽃을 심어 골목의 생기를 불어넣는 그들의 작은 날갯짓이 ‘나비효과’를 가져와 마을 자원을 연계해 하나의 호텔처럼 운영하는 ‘마을호텔 18번가’를 탄생시켰다. ‘폐광촌의 작은 기적’이라고 불리는 강원 정선군 고한 마을의 얘기다.


◆개발에서 주민 주도 재생으로
고한 마을은 정선에서 태백으로 넘어가기 전 백두대간 아래 자리한 마을이다. ‘정선아리랑’을 벗 삼던 산촌마을은 1950년대 중반부터 탄광 개발로 활기를 띠며 광부들이 모여드는 탄광 마을로 개발됐고, 인구도 꾸준히 늘어 1980년대 초 3만2000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석탄 산업의 사양화로 정부가 1980년대 후반 탄광 통폐합을 추진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광부들이 마을을 떠났고, 위기가 시작됐다.

2000년 강원랜드 카지노가 마을 인근에 들어서고 ‘하이원리조트’ 등 관광산업 개발 추진으로 마을 명맥은 유지됐지만 쇠락의 흐름을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인구는 1995년 1만명에서 반 토막으로 줄었다. 마을이 없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체감한 주민들이 개발 일변도의 정부 주도 사업의 문제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2020년 11월 고한읍 인구는 4700여명이다.

어둠이 깔리면 동네 주민들조차 피해다녔던 그 골목은 불과 3년 사이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사진제공=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

“강원도 18개 시군 중 4개 시군이 탄광 지역이에요. 국가가 해마다 강원랜드 카지노 수익금의 25%를 폐광지역개발기금(매년 1000억원 이상)으로 걷고 폐광 지역 지자체에 내려 보내면 그 돈으로 지역개발사업을 해 왔어요. 지난 20년 동안 말이죠. 리조트가 들어오고 도로가 깔리고 하드웨어 측면에서 여러 성과를 냈는데, 이게 마을로 스며들지 않았죠. 오히려 역효과가 났어요.”

김진용 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 상임이사의 얘기다. “개발 사업을 해오는 20년 동안 인구는 계속 줄어들었어요. 결국 정부나 기업이 추진하는 정책이 실패했다는 거죠. ‘수조원의 개발 사업이 진행됐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하고 주민들은 굉장히 황당해했고요. 결국 답은 ‘우리가 해야 되는구나, 남이 대신 해 줄 수는 없구나’, 이런 깨달음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재개발 방식이 아니라 주민 스스로 하는 마을 재생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주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부터
변화의 불씨는 마을에서 인적이 가장 뜸한 고한 18리 작은 골목에서 지펴졌다. 골목의 대부분은 사람이 떠나 흉물스럽게 방치된 빈집들이었다. 일부 오래된 가게들이 군데군데 있을 뿐 “어둠이 깔리면 동네 주민들조차 피해 다녔다”는 그 골목이 변화의 터전이 될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017년 10월 마을 토박이인 김진용 상임이사가 골목의 빈 집을 수리해 ‘하늘기획’ 사무실을 차렸고, 마을 만들기 위원회 설립 이전 사무국 역할을 했다. 2018년 1월 이음플랫폼이 골목 안에 개소했고, ‘고한 18번가 마을 만들기 위원회’가 꾸려졌다.

처음은 작지만 주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전부였다. 골목에 거주하는 할머니의 노후주택을 리모델링했고, 방치돼 있던 쓰레기를 치우고 매일 같이 청소하고 꽃을 심었다. 낡은 집에 페인트도 칠했다. 그러자 골목길 풍경이 조금씩 달라졌다. 6개월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주민들이 마을 살리기에 나설 수 있도록 행정 당국이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고, 재정 지원이 더해지자 마을 가꾸기는 탄력을 받았다. 2018년 빈집 10채가 새롭게 단장됐고, 이듬해인 2019년에도 추가 10채의 리모델링이 계속됐다. 다른 빈집 10채에는 상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무도 찾지 않던 골목은 불과 2~3년 사이에 주민들 손에서 새롭게 재생된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흉가 같은 빈집들이 방치된 골목은 꽃과 그림 등으로 아기자기하게 새롭게 ‘재생’됐다. 한 마을 주민이 자신이 내놓은 화분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

김진용 상임이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저분한 골목을 매일 같이 청소하고 꽃을 심는 등 작은 일이 전부였어요. 하지만 차츰차츰 동네가 환해지기 시작했죠. 이런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2018년 첫 해의 가장 큰 성과였어요. 주민들에 대한 신뢰가 쌓이자 행정 지원이 이뤄졌고 불과 2년여 동안 골목에 있는 집 40채 중 30채 넘게 새롭게 바꿀 수 있었어요.”

김진용 상임이사는 “행정이 많은 예산을 투입했지만 마을을 못 살린 것은 마을에서 일을 할 수 없어서였다. 행정은 지원의 역할이지 결국 일을 하는 것은 마을 주민들이기 때문”이라면서 “이 동네에 사는 것이 부끄럽다는 패배감이 주민들에게 있었는데, 내가 이 동네의 주인이고 마을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는 것은 완전히 달라진 부분이다. 이것은 지속가능성이 생겼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마을 전체가 호텔이 되다
주민들로부터 시작한 마을 가꾸기는 지자체와 전문가들의 역량까지 더해져 2020년 5월 ‘마을호텔18번가’ 개장으로 이어졌다. 2018년과 2019년 마을의 하드웨어를 정비한 데 이어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마을호텔’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국내 최초로 도입한 것이다.

마을호텔은 마을에 있는 자원들을 연계해 마을을 통째로 하나의 호텔로 보고 운영하는 방식이다. 기존 호텔이 한 건물에 식사와 숙박, 휴식, 놀이, 소비 공간을 담아냈다면, 마을호텔은 길과 골목을 따라 마을 전체에 부대시설이 마련돼 있다. 기존 호텔이 폐쇄 지향적 공간이라면 마을호텔은 개방 지향적 공간에 가깝다. 마을호텔은 ‘누워있는 호텔’이라고도 불린다. 마을 전체가 하나로 조직돼 관광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마을호텔은 일본에서는 몇 년 전에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고한마을 사례는 일본 사례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김진용 상임이사의 얘기다. 김진용 이사는 “일본은 마을호텔을 ‘커뮤니티호텔’이라고 한다. 게스트하우스 같은 시설을 짓고 주민들이 공동 사업을 하는 것이지 각각의 상점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고한마을호텔과 일본 사례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마을호텔18번가 객실 프런트 모습. 사진제공=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

마을호텔18번가 골목에는 마을호텔(객실 3개)을 비롯해 중국집, 여관, 사진관, 식당, 도서관, 공예카페, 야외정원, 이발소 등이 민가와 어우러져 자리하고 있다. 마을호텔 객실에 숙박하는 이들은 마을 안 부대시설을 할인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마을 골목 곳곳에서는 아기자기한 장식물로 꾸며진 담벼락, 벽화들을 볼 수 있다. 골목 정원도 명소 중의 하나다. 골목을 걸으면서 만나는 꽃들이 여행의 향긋한 추억을 선사한다. ‘야생화의 고장’에 걸맞게 밤이 되면 LED야생화가 반짝반짝 빛나며 골목 안을 밝힌다. 이 모든 것들이 마을 주민의 손을 거쳐 생명을 얻었다.

마을호텔18번가 객실 모습. 사진제공=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

개장 초반 두 달 동안은 예약이 가득찰 정도로 성황을 누렸다. 골목길의 정겨움을 반가워하는 여행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한 마을도 코로나19 사태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경기 침체와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방역 지침에 의해 마을호텔 운영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마을호텔 모델의 수익 가능성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게 내부의 평가다. 2020년보다 2021년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특히 마을호텔18번가는 주민들이 중심이 되고 다양한 역량을 가진 기관, 단체, 전문가들을 한 데 모아낸 성공 모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마을호텔’이라는 아이디어를 착안한 것도 전문가 제안에서 비롯됐다. 마을호텔18번가는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장상 수상을 비롯해 국토부장관상, 강원도지사상을 수상했다.

 

더디더라도 ‘주민 손으로’…지속가능성 자신

이 마을 토박이로 변화의 불씨를 지펴내는데 큰 역할을 한 김진용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상임이사.

스스로 번 돈으로 차츰차츰 확장
협동조합 통해 구상 본격화 계획


◆마을여행의 플랫폼으로
이제 첫 발을 내딛은 마을호텔18번가의 미래 비전이자 지향점은 ‘마을여행의 플랫폼’이다. 마을호텔 18번가 2호점, 3호점 등 고한 마을의 기존 자원들을 연계해 마을여행을 돕는 여행자 플랫폼을 구축하겠다는 목표다. 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을 통해 이런 구상들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김진용 상임이사는 “마을호텔18번가를 통해 예약을 하면 지역 상가를 이용할 때 할인을 받을 수 있고 ‘하이원리조트’나 정선군의 관광 상품도 협약을 통해 할인 받을 수 있는 등 서비스 영역을 점점 확대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무궁무진한 확장가능성을 갖고 있다”며 “올해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2~3개월밖에 운영을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고객들의 수요에 맞춘 콘텐츠와 프로그램 개발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진용 이사는 “처음 1~2개 빈집을 바꿀 때 사람들이 비웃었다. 하지만 2년 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면서 “시간이 더디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번 돈으로 차츰차츰 확장하는 방식으로 가려고 한다. 늦은 것 같지만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주민들이 만든 LED야생화 수공품이 밤이 되면 마을 곳곳을 환하게 밝힌다. 사진제공=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

또 그는 “도시재생사업은 기본적으로 행정 주도 사업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주민이 주도하고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간다면 큰돈이 들지 않는다. 마을호텔이라는 결과물만 봐선 안 된다. 2년 넘게 주민들이 함께 해 온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며 “마을호텔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동네라도 할 수 있지만, 행정이 주도하는 방식은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성진 기자 kosj@agrinet.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