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나 청년농부·전남 구례

[한국농어민신문]

“탁탁타악 탁탁타다닥.” 올 여름, 뉴스에 연일 보도된 큰 비로 작물들이 결실을 잘 맺지 못했지만, 밭마다 가을걷이를 했다. 이전 보다 양이 적다고, 수확을 하지 않을 순 없으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마당이나 마을 회관 앞처럼 넓은 곳에서 가을볕의 도움을 받아 바쁘게 가을걷이를 마무리 하는 나날이 흘러가고 있었다. 특히 들깨와 콩 터는 소리는 어디서건 들을 수 있었다. 가을의 끝자락을 알리는 그 소리들이 예전엔 그저 평화롭게만 들렸는데, 이젠 해야 할 일을 재촉하는 소리로 들린다.

늘 한 발 늦는 농부인 나는 올 해도 콩털기가 늦었다. 뒷집 할머니가 볕이 좋은 날 펼쳐 놓고 다시 한 번 말리며 털어야 꼬투리가 벌어져 쉽게 턴다고 알려주셨는데, 나는 가을볕이 거의 사라진 무렵에야 콩을 털며 고생을 한다. 털었다고 끝이 아니다. 돌멩이나 꼬투리 같은 이물질들을 골라내야 하고, 양이 많을 때는 판매를 위해 크기 선별도 해야 한다.

할머니들은 어떻게 그 긴 과정을 그리 빨리 끝내실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메주콩은 메주를 띄워야 하니 서둘러 정리를 마친다. 하지만 급하지 않은 서리콩은 큰 대야에 담아 방으로 들고 와 틈틈이 고르기 작업을 한다. 겨울철 방 안에서도 농사일이 계속되는 것이다.

찬바람이 불며 12월이 되었고, 콩을 고르기 시작했다. 구례에선 겨울이 왜 이렇게 빨리 오는지 모르겠다. 농한기인 겨울을 기다리는 탓인지, 계절이 지나가는 현장 속에 파묻혀 살게 된 탓인지 이유는 정확치 않다. 난로 앞에 앉아 콩을 고르다 보면 나른해진다. 그럴 때면 커피 한 잔이 간절하다.

구례에 온 후에도 커피를 끊지 못했다. 읍으로 나가지 않으면 카페가 없는 동네에 살면서 다른 방법을 찾았다. 생두를 사서 저온 창고에 쟁여 놓고선, 직접 로스팅을 해서 마신다.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서울 가정집에서 로스팅을 한다면 이웃이 신고를 했을지도 모른다. 로스팅할 땐 연기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골에선 집에서도 로스팅이 가능하니, 신선한 원두를 내 입맛에 따라 볶아서 커피를 마시게 됐다. 서리콩을 선별하다가, 커피콩을 로스팅 한다. 커피는 동티모르산이다.

내가 서울에서 일했던 시민단체는 국제연대 업무 중 하나로 공정무역 사업을 했다. 불편한 잣대지만, 저개발국가로 분류되는 동티모르와의 무역이었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섬 중 하나였다가, 2002년에 독립한 작은 나라다. 이 섬나라 산골 마을의 자립을 돕기 위해 그 마을의 주요 생산물인 커피를 한국으로 수입하는 일을 했다.

단순히 기존 무역 체제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생산자와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거래 조건을 제시하기만 할 뿐 아니라, 생산자들 스스로 빈곤을 극복하고 공동체와 환경을 돌보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것이 공정무역이 지향하는 바이다. 그 뜻에 따라 우리 단체는 다른 회사들에 비해 커피 수매가격을 높이 책정했고, 생산지에 협동조합이 만들어 지도록 돕고,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전기, 교육, 의료시설 개선에 함께했다.

서울 사무국에서 동티모르 현장을 지원하며, 공정무역의 필요성에 대한 캠페인 활동을 했던 나는 현장에서 온 보고서들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우리 동티모르 커피는 다른 회사들이 하듯 커피를 싼 가격에 수매해서 공장 기계로 선별하지 않아요. 생산지 여성과 노인들의 인건비를 지켜 주기 위해서 손으로 선별하는 핸드 피킹(hand-picking)방식을 유지하고 있어요. 핸드 피킹된 커피는 기계에서 선별된 것과 달라요. 그래서 커피 맛이 더 좋아요!”

이런 주장을 펼치며 공정무역 커피를 알리고 판매 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 깊이를 모른 채 말만 했었음을 서울을 떠나 콩 농사를 짓고, 손으로 콩 선별을 하다 알게 된다. 농부로 살다보니, 머리로만 알며 했던 말들이 내 몸으로 다시 찾아오는 경험을 한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커피나무의 열매 속 씨앗인 생두(green bean)를 말린 뒤 볶아서 원두(whole bean)로 만들어 물을 이용해 추출한 음료다. 커피도 콩이라 부른다. 동티모르 산골에서는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커피 열매를 수확한 뒤, 오랜 시간 손으로 상품이 되는 커피콩을 선별한다. 선별한 콩을 가지고 와 좀 더 나은 값을 받고자 우리 단체를 찾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늘 생산자라고 불렀는데, 그들도 지금의 나처럼 농부였다.

서리콩 한 알 한 알이 귀해서 겨우내 골라내듯, 동티모르 농부들 역시 나와 비슷하게 커피콩을 수확하고 선별했을 테다. 고된 손을 거쳐 왔을 커피콩 한 알 한 알에 눈길이 간다. 커피가 너무나 흔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 커피 한 잔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리는 농부들을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공정무역 사업을 할 때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전 지구의 농부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생산한 농산물의 값을 제대로 받길 원하는 만큼, 지구 반대편 농부의 생산물 역시 그 값을 정당하게 받아야 함을 온 몸으로 확신한다. 더 넓고 깊게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하는 존재, ‘농부’로 살고 있다는 점이 한 해를 마무리하며 가장 감사한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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