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농부라 불리는 것이 좋지만, 농부라는 이름이 나를 표현하는 전부가 되지 않길 바란다. 나는 농사지으며 글을 쓰고, 밥을 짓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이따금 장터에 나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팔고, 익숙한 친구들을 만나 재미난 작당을 벌이고. 또 걷는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해마다 가을이면 씨앗을 남겨 놓는 일에 가장 마음을 들인다. 하지만 올해는 여름 장마에 녹아 버린 토마토와 병이 들어 버린 붕어초(토종 고추) 씨앗을 받지 못했다. 오이는 겨우 씨앗만 건졌다. 해마다 토종 콩 여러 종류를 조금씩 나누어 심는다. 그런데 콩이 잘 여물지 못했다는 이웃 농부님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많았다. 다음해 심을 씨앗을 남기지 못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애태우는 내 마음을 콩이 알아주었는지 다행히도 씨앗을 남길 만큼은 수확했다.
‘언제 보아도 동글동글 예쁘기만 하던 콩이,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 계절을 지나 보냈을까’ 생각하니 어쩐지 애처로워 보였다. 아무튼 살아남아서, 아직 살아 있는 나를 만나러 와 주어서 고맙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농부라면 모든 작물에게 똑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어 주어야겠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나는 편애하는 작물이 있다. 한 해 농사 가운데 콩 농사를 지을 때, 가장 신바람이 난다. 동글동글 모여 있는 콩들을 보기만 해도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콩을 겨우내 가려서 통에 담아 놓으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쥐눈이콩, 아가콩, 퍼렁찰콩, 오가피콩, 선비자비, 오리알태, 아주까리밤콩, 붉은팥, 검은팥, 애경팥. 녹두, 여러 울타리 콩들…. 모양과 크기와 빛깔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지만 한데 모인 콩들은 서로 참 잘 어울린다. 티를 골라낸 콩 가운데 좋은 콩을 또 가려서 씨앗으로 남겨 둔다. 씨앗이 담긴 봉투를 차곡차곡 모아 선반에 올려놓으면 얼마나 뿌듯한지. 가을걷이 하느라 쉴 틈 없이 고단했던 몸이 새처럼 훨훨 가벼워진다.

탁탁탁, 하루 내내 마당에 앉아 콩을 터는 단순한 일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찾아온다. ‘모양도, 크기도, 빛깔도 다른 콩들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데, 사람은 왜 이렇게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걸까?’ 도시에 살던 나는 ‘나다움이 무엇일까?’하는 고민 끝에 농부가 되었다. 일곱 해째 농촌을 떠나지 않고 농사짓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밭에 서 있는 내가 멋있기 때문이고,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이곳에서 얻기 때문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런 내 삶을 어떤 기준에 가두어 판단하지 않는다. 검은팥에게 “너는 왜 붉은색이 아니야?”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냥 내가 가진 모양과 빛깔을 바라보아 주는 것이다. 저마다 가진 모양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으며 사는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나라고 나를 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며, 나를 찾아가고, 받아들여 갈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을 때, 나와 다른 누군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에는 모르면서 오해하고, 모르는 사이 판단 받는 기준으로 가득하다. 나를 들여다볼 시간을 가지기도 전에, 누군가를 판단하기가 더 쉽다. 잃어버린 자연스러움을 다시 찾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지구’의 자연스러움뿐만 하니라 ‘나’의 자연스러움, ‘삶’의 자연스러움을 말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해가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어떤 직업이나 이름 하나에 자신을 가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살아가는 내가 좋아서 농촌에서 산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 준 농사를 짓는다. 농부라 불리는 것이 좋지만, 농부라는 이름이 나를 표현하는 전부가 되지 않길 바란다. 나는 농사지으며 글을 쓰고, 밥을 짓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이따금 장터에 나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팔고, 익숙한 친구들을 만나 재미난 작당을 벌이고. 또 걷는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래서 ‘저 사람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정의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농촌)에 모여 살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 끝에, ‘단순히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청년을 돕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따라온다. 어쩌면 지금 청년들에게는 ‘일자리’보다 있는 그대로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삶자리’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자연과 가까운 농촌이 우리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할 수 있는 터전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고립된 농촌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 마음껏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농촌이 되었으면 좋겠다.

탁탁탁, 콩과 함께 터져 나온 생각들을 포대에 쓸어 담았다. 콩이 내 몸에 이로운 밥이 되듯, 이 생각들이 흔들리는 청년들에게 이로운 밥이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한 알도 남기지 않고 싹싹 쓸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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