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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흉년을 마주하는 자세이아나 청년농부·전남 구례

[한국농어민신문]

뒷집 할머니가 밭에서 가을걷이를 하신다. 토란 캐는 법을 물으러 갔다가 여기저기에서 들은 흉작 소식들을 전하는 내게 말씀 하신다. “그동안 고맙게 계속 풍년이었던 게야. 이 땅서 늘 빼 먹었는데, 올 한 해 좀 못 얻었다고 뭐 그리 억울할 거 있나~”


“캐지들 말어~ 씸들여 캐 봤자, 없어! 고구마가 한나도 안 들었당께!” 고구마를 캐기 시작한 우리에게 동네 할머니들이 오며 가며 같은 말을 반복하신다. 고구마를 많이 키웠으면 기계로 캐겠지만, 집에서 먹고 농산물공방에서 사용할 용도로 50평 정도만 심었기 때문에 손으로 캐야 했다. 고생에 비해 수확량이 말도 못할 정도로 적을 것을 이미 고구마를 캐신 할머니들은 알고 계셨다. 그래서 차라리 캐지 말라는 것이다.

귀농 교육에서 고구마는 농사 초보도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작물 중 하나로 배웠다. 실제로 고구마 순을 옮겨 심은 후, 순이 말라 죽을까봐 물조리개로 물을 주는 고생 정도만 하고 나면 여름 내내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그래도 늘 결과가 좋았다. 키우는 것 보다 캐는 일이 힘들다고들 했지만, 흙을 팔 때 마다 보이는 크고 붉은 고구마 담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고구마가 정말 없었다. 땅을 파고 파도, 줄기만 보이고 알이 없었다. 어쩌다 한두 개 보여도 내 손만한 크기였다. 늘 발 정도로 큰 고구마, 심지어 얼굴만큼 큰 것도 나와서 어이없이 웃으며 기념 촬영도 하곤 했는데 올 해는 고구마를 캐는 내내 웃을 일이 없었다. 흙 속에 고구마가 없으니 오히려 땅은 더 딱딱해 호미질도 어려웠다. 수확한 고구마 박스엔 사람이 먹을 건 없고, 이웃 언니네 반려견 간식으로 쓸 것만 가득했다.

고구마뿐만이 아니다. 새벽에 이슬을 맞아 촉촉할 때 베라고 배운 대로 들깨를 벨 때도 할머니들이 한 마디씩 하신다. “이 집은 알 좀 찼어? 50년 넘게 농사지음서 내 올 해 같은 농사 첨 본당께. 콩이니 들깨니 몇 되 되질 않어.” 동네 할머니의 추수 날, 쌀 포대 옮기는 것을 도와 드렸더니 쌀도 마찬가지다. “이 논에서 꼭 열 한가마니씩은 나왔는데, 아홉가마니 밖에 안 나왔당게.” 올 해 수확의 결과 모두 양이 적고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말들이다.

나의 경우 고추밭 250평이 폭우에 잠겨 고추를 거의 수확 못했고, 들깨, 고구마, 콩처럼 한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수확하는 작물들은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양이 적다. 어느 어르신의 표현대로, 올 해는 ‘흉년’이다. 수해, 한해, 풍해, 충해 등을 흉년의 원인으로 꼽는데 구례는 지난 8월, 연신 뉴스에 보도될 만큼 큰 수해를 입었으니 농사의 결과가 좋을 리가 없다.

‘농작물이 예년에 비해 잘 되지 아니하여 굶주리게 된 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흉년. 오직 농업이 중심이던 시절에는 흉년이 들면 온 나라가 굶주려야 했을 것이다. 이젠 흉년이라 해도 굶주리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나라 생산물이 부족하면 수입 농산물을 더 확보해 공급하면 되니까. 그래서 더 이상 무시무시한 단어가 아니지만, 지금도 흉년은 농민에겐 무시무시한 단어다.

솔직히 나는 흉년이 뭔지도 잘 모르는 농사 초보다. 아직 내 땅도 없는 소농이고, 기술과 경험이 한 없이 부족하다. 거기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고, 공장형 퇴비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소량 사용하고 있으니 늘 주변 농부들에 비해 수확량이 확연히 적다. 양 뿐만 아니라 크기도 작고 모양도 볼 품 없다.

남들에 비하면 흉년이지만, 나는 늘 풍년으로 느껴왔다. 뭔가 땅에서 거저 얻는다고 여겨질 때가 많았다. 농사를 늘 풍년으로 여겨왔기 때문인지, 흉년이 와도 솔직히 아주 힘들진 않다. 하지만 주변의 베테랑 농부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흉년을 마주하는 자세야 말로 농부에게 필요한 듯하다.

<작고 강한 농업>을 쓴 히사마쓰 다쓰오는 농업을 이렇게 표현했다. “어떤 것을 만드는 일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농업은 만드는 행위에 사람이 관여할 수 없다는 데 그 재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식물이 자라는 과정 자체에는 직접 관여 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작물이 잘 자라도록 환경을 갖출 수 있을 뿐.”

환경에서 가장 큰 부분이 날씨다. 주변 농부들이 올 해만 특별히 정성을 덜 쏟은 것도 아닌데 그 결과가 좋지 않다. 흉년이니까. 농사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넘어서는 자연의 영역이 있다는 말은 진실인 것이다. 자연의 영역인 날씨를 농부가 어쩔 수 없으니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작물 재해보험에 드는 것일까? 보험과 사회적 재난 지원 정책도 필요하지만, 자연 앞에 겸허하게 농사짓는 분들이 흉년에도 더 잘 버텨내는 것을 보게 된다.

뒷집 할머니가 밭에서 가을걷이를 하신다. 토란 캐는 법을 물으러 갔다가 여기저기에서 들은 흉작 소식들을 전하는 내게 말씀 하신다. “그동안 고맙게 계속 풍년이었던 게야. 이 땅서 늘 빼 먹었는데, 올 한 해 좀 못 얻었다고 뭐 그리 억울할 거 있나~”

흉년은 농부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인 듯하니 흉년을 마주하는 자세를 장착해 두려 한다. 땅이 주는 결과물을 고마워하는 마음. 내 힘으로만 되지 않음을 인정하는 자연 앞에서의 겸손함. 무엇보다 뒷집 할머니처럼 한 해만 보지 않고 의연히 농사짓는 한결같은 긴 호흡. 올 해 농사를 마무리 하며 이 자세들도 꼭 수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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