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농어민신문]

‘농민’ 개념을 법률로 제정해야만 해소될 것 같은 정책 요구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법률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보다 느리게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논의할 시간적 여유가 아직 있다는 말이다.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진다. A가 말한다.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란다. B의 말은 다르다. 사과가 떨어지는 건 가을이 왔기 때문이란다. 누구의 설명이 옳을까? A의 설명은 과학적 설명이고, B의 설명은 과학적 설명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설명’이다. 둘 다 일리(一理) 있는 말이다. 누가 옳은지를 따지는 건 실익이 없다. 살펴볼 만한 게 있다면, 그런 대화가 이루어지는 맥락에서 누구의 설명이 더 적절하냐의 문제다. 중학교 과학수업 시간이라면 A의 설명이 자연스럽다. 외할머니와 어린 손자가 이런 저런 일상을 이야기하던 중이라면 B의 말이 멋스럽다. 대화나 토론이 겉돌고 열매맺지 못하는 건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처럼 흔한 일인데, 사람들이 대화의 맥락을 공유하지 않은 채 각자 다른 문맥에서 말하기 때문에 그럴 때가 많다. 이른바 ‘농업인의 법률적 정의(定義)’를 둘러싼 논의에서도 그런 기미가 보인다.

C는 법률에 ‘경지면적 1,000제곱미터 이상’ 혹은 ‘농산물 판매금액 연간 120만 원 이상’이라고 되어 있는 ‘농업인 정의’가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기준이 낮아서 필요 이상으로 농업인 수가 많은 셈이며, 각종 보조금이나 농업정책 자금이 비효율적으로 쓰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가령, 도시에서 살다가 귀촌해서 텃밭보다 조금 넓은 수준 1,000제곱미터의 경지에서 농사짓기는 하지만, 농사가 아닌 다른 일을 주업(主業)으로 하는 사람까지 농업정책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또는, 그렇게 기준이 ‘낮은’ 상태에서 소농직불금이 지급되니 경지 규모가 작은 고령농들이 공식적으로 은퇴하지 않고 농지를 붙들고 있어서, 젊은이들 땅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기준을 상향하자고 말한다. 일리가 있다.

한편, D는 농촌이 (인구 측면에서) 붕괴한다면 국토 관리도 농업 유지도 난망(難望)이니 모든 농업인을 ‘국토관리자’로 지정하고 직불금이든 수당이든 지급하자고 말한다. 이때 ‘농업인 정의’에서 경작 면적을 높여 정하이자는 말은 없다. 농촌에 ‘농사지으며 사는 사람’이 있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E는 영농에서 은퇴한 어르신도 수십 년 농사지으며 농촌을 지켜 온 공로가 있는 데다가, 여전히 마을에 살면서 지역사회 유지에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그들에게도 농민기본소득을 지급하자고 주장한다. 이 또한 일리 있는 주장이다.

F는 법률상 농업인인 사람 모두가 농촌 유지에 기여한다거나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농업이란 농작물재배업, 축산업, 임업 및 이들과 관련된 산업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을 말하며, 농업인이란 농업을 경영하거나 이에 종사하는 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자”라는 법조문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도시화된 곳 아파트에서 살면서 시골 마을의 축사로 출근해 양돈 경영하면서 혹은 농약을 많이 쓰는 농법을 유지하면서, 마을에는 기여하는 바 없이 악취를 풍기거나 수질을 흐리거나 생태계 보호에 반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보조금을 주는 게 당치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이도 현행 법률의 ‘농업인 정의’ 기준을 충족하므로 농업인이다.

한편, 마을에 함께 살면서 성실히 농사짓고 마을 공동체의 일에 부지런히 참여하지만, 농지원부 없이 구두 계약으로만 임차한 농지에서 농사짓고 있어서 농업인으로 인정되지 않는 일도 있다. 이런 모순을 해소하려면 법률에서 ‘농업인’과는 별도로 ‘농민’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도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여러가지 일리들 사이에서,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을 개정해서 그 모든 주장을 충족시키는 게 가능할까? 쉽지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법률에 문제가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주장들이 각기 다른 맥락에서 제기되었기 때문 아닐까? 상위 법률 수준이 아니라 각기 다른 맥락의 정책 요구 각각에 조응하는 하위 법규나 정책사업 지침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해법을 찾는다면 어떨까?
 
가령, C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소농직불금은 원래 규모가 작은 영세농에게 지급하자고 한 것이니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소농직불금 때문에 고령농들이 은퇴 시기를 늦추는 게 문제라면, 법률 조문을 개정하기보다는 영농 은퇴할 때 직불금보다 더 많은 혜택이 가도록 다른 정책 수단을 마련하는 게 합리적일 수 있다. 대형 농기계 획득을 지원하는 정책사업은 그것이 꼭 필요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농업인들만을 대상으로 추진하게끔 정책사업 지침을 만들면 될 터이다(이미 그런 경우도 많을 터이다). 다만, ‘농민’ 개념을 법률로 제정해야만 해소될 것 같은 정책 요구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법률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보다 느리게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논의할 시간적 여유가 아직 있다는 말이다.

덧붙여, 법률상 ‘정의’ 규정에 관한 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농민’을 표현할 술어-동사의 목록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라 말하고 싶다. 지금은 ‘이러저러한 일을 하는 이야말로 농민이라 부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이러저러한 이는 농민이 아니다’라고 말하기가 더 쉽다. 가령, 마을공동체의 이웃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는 진정한 농민이 아니다. 돈을 더 많이 벌겠다는 요량으로 토양이나 물을 오염시키는 방식으로만 농사짓는 이는 진정한 농민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기는 쉽지만, ‘무슨무슨 활동을 하는 이가 진짜 농민’이라고 말할 ‘활동’의 목록은 아직 짧지 않은가? 주어-명사는 범주를 구분하는 데 쓰이지만, “나날이 새롭게 탄생하고 조형되는 술어-동사들은 주어의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기존 주어의 체제를 끓어 넘치게”(김영민, 《공부론》) 만든다. 세상을 빚어내는 일은 딱딱하게 굳은 법률 개념이 아니라, 술어-동사로 번뜩이며 존재하는 농민의 실천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