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희/전남 진도

[한국농어민신문]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밭 1800평 경작하는 남편과 결혼
주로 키위 키우며 규모 늘리다
태풍 피해로 밭·집 무너진 적도 

남편이 해외로 연수 떠난 다음 날
트랙터 유압에 손 끼여 수 차례 수술
골육종으로 투병 중이던 셋째 아들
다래꽃 수정 한창 때 열여섯 생 마감

결핵 앓은 남편 영향 선택한 무농약 
수고에 합당한 소득은 기대 어려워
내 삶 이야기 SNS 쓰며 판매 늘어가 
건강 먹거리 생산, 당당한 농부 될 것


55년 전, 나는 지지리도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6·25 동란 때 부모님은 피난 다니다 땅 한 뙈기 없이 임 씨들 집성촌에 정착하셨다. 강변 토사가 모이는 척박한 땅을 열심히 일구셨지만, 그 작은 땅으로는 육 남매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서 늘 품팔이를 하셨다. 그 영향이었을까. 무의식중에 나는 큰 농토를 가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혼할 당시 남편은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1800평의 밭을 경작하고 있었다. 그중 600평이 키위밭이었다. 나머지 땅에는 조를 심고 고추와 깨도 심었다. 조그마한 뜰 앞에 비만 가리는 형태의 외양간이 있었고 여덟 마리의 소가 있었다. 남편은 초보 농군, 나는 왕초보, 시키는 일이나 하는 수준이었다. 남편은 논두렁길 따라 새참을 이고 오는 아내를 기다리는 농부가 꿈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서남해안에 뿌리내리던 키위는 양다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재배기술 보급이 미흡하여 겨울에 전지하려면 실타래처럼 엉킨 가지 하나를 찾아 정전작업을 했다. 하루에 한 나무나 할 듯 말 듯 한 더딘 일이었다.

900평의 키위밭을 더 조성했다. 키위가 커서 수확이 나기 전에는 소득이 없다. 그래서 나무 사이에 간작을 해야 했다. 노동의 양이 두 배로 늘었다. 900평 키위밭이 5년이 되어 제대로 수확할 수 있는 해였다. 태풍 매미가 서해안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사하기만을 비는 마음뿐이었다,

남편과 축사를 돌보러 나갔다. 남편은 뒤쪽에서 축사 슬레이트가 떨어져 날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남편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탐스럽게 열매를 달고 있던 키위밭이 아주 조용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남편은 못 본 듯했다. 나는 남편 옆으로 가서 말했다.

“사람도 죽고 사는데 태풍이 지나가면 고칩시다.”

남편은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더니 돌아서서 넋을 놓았다. 바닥에 누워버린 구조물들과 나무들을 보며 남편은 막막한 듯 말을 잃었다. 설상가상이었다. 바람 속으로 어머니의 작은 몸이 급한 손짓을 하며 부르셨다. 집이 무너졌단다. “애들은요!”하면서 뛰었다. 다행히 지붕 난간이 무너져 내려 있었고 아이들은 집 안에 있어서 다치지 않았다. 그해 겨울까지 키위나무들은 그렇게 땅에 누워 있었다.

낙엽이 지자 파이프들을 잘라내고 다시 세우며 나무들을 일으켜 세웠다. 점차 키위의 소비가 늘어갔다, 육식을 많이 할수록 키위 수요가 는다고 했다. 키위에는 지방을 분해하는 액티니틴이라는 성분이 있고 16종의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다.

키위밭 주변 밭들을 조금씩 키위밭으로 늘리다 보니 2500평이 되었다. 태풍에 무너진 과수원도 다시 복원되었지만 상처 받은 나무들은 하나둘씩 죽어갔다. 과수는 한해 소득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3년 동안 후유증을 남긴다. 아파서 죽은 나무들을 베어내고 다시 심고 그렇게 버텨 냈다. 긴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키위 과수원도 자리 잡아가고 재배 방법도 조금씩 배워갔다.

남편은 건강하지 못해서 힘든 일을 못 했다. 객지 생활 2년 만에 결핵을 앓아 낙향한 사람이었다. 고추밭에 약을 한번 치고는 중독이 되어 고생했다. 그래서 농약을 하는 농사는 피했다. 키위 농사는 약을 안 해도 그나마 수확이 나니 짓게 된 것이다. 수입은 늘 일당벌이 반도 안 되는 돈이었다.

남편은 후계자 자금을 받아 야트막한 산을 평당 3500원에 사서 개간했다. 겨우내 큰 포크레인이 밭을 만들어 갔다. 기계가 빠져나가면 돌을 줍고 다시 갈고 돌을 줍는 일이 반복되었다. 개간해서 농토를 만든다는 일은 스님이 도의 경지에 이르는 일처럼 긴 고행의 연속이었다. 나는 콩쥐처럼 늘 돌멩이를 주워내고 있었다. 살림은 힘들었고 소득은 없었다. 붕어빵 장사라도 해 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 와중에 2005년에는 칠레와 자유무역 협정이 체결되었다. 4월 1일 양다래를 망다래라 하여 정부에서는 폐원 자금을 주면서 폐원을 독려했다. 진도의 400여 키위 농가가 폐원을 시작했다. 한 농가씩 포크레인으로 몽땅 긁어 버리는 방법으로 폐농했다. 가을에 조합에서 수매해가는 키위는 일 년 수입이 600평에 200만원 정도가 고작이었다. 재배 기술도 정립되지 않은 막막한 상태였다. 그즈음, 조합에서는 교육을 시작했고 농민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배를 이어갔다.

2005년 남편은 한 칠레 FTA 자금 지원을 받아 2500평의 다래밭 조성사업을 받아 놓았다. 조사료 사업도 그해에 같이 받게 되었다. 소들을 건강하게 키워야 한다며 청보리를 갈았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2500평의 키위밭을 조성할 작업으로 물 빠짐 관을 묻고 퇴비를 듬뿍 넣어 포크레인으로 뒤집기를 하였다. 키위가 국내 소비자들한테 알려지고 소비가 늘었다. 외국계 유통기업 제스프리사가 대대적인 홍보를 해서 더 빨리 알려졌다, 뉴질랜드산 키위는 국내산이 소진되는 4월에 들어옴으로 농가에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셋째 아들이 골육종 진단을 받았다.

“열여섯 번째로 등록된 악성종양입니다. 큰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명치끝을 예리하게 찔린 듯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진료실을 나와 대기 의자에 주저앉아 소리도 없이 입만 벌리고 울었다. 초등학교 6학년 셋째아들이 어깨에 500원 동전만 한 혹이 있어 한 검사였다.

‘유잉육종 질병코드 41,악성 신 생물.’ 왜? 우리에게? 무슨 죄로? 수많은 자책과 불안이 엄습해 왔다. 우리는 왜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가족 모두가 폐허에 떨어진 듯했다.

그해 남편은 농업기술원에서 운영하는 유기농 생명 대학을 졸업해서 해외연수 기회가 주어졌다.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가라고 설득했다. 나중에 갈 수도 있겠지만 같이 가서 보면 좋을 것 같았다.

안 좋은 일은 몰려다닌다던가. 남편을 보내고 다음 날, 외양간을 치우다가 트랙터 유압에 손이 끼이는 사고를 당했다. 나는 병원에 입원했고, 아이 항암 치료는 작은 언니가, 집안 살림은 큰 언니가 맡아 주었다. 남편한테 전화 오면 아무 일 없는 듯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에 동네 사람 병문안 온 줄 알고 들어온 남편이 기가 막혀 했다. 멀리 외국에서 이 소식을 접했으면 더 놀라고 힘들 것 같아서 숨겼다고 했다. 남편이 오고 나는 큰 병원으로 옮겨 두 번의 수술을 더 받았다.

죽을 것만 같던 시간도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아이도 항암 치료가 끝나 정기적인 검사가 진행되었다. 병원을 오가며 나는 세상에 수많은 아픈 이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나는 그동안 이렇게 많은 아이가 소아암으로 죽어가는 것을 왜 몰랐을까? 연말이면 텔레비전에 소아암 환자 돕기 행사가 그렇게도 많이 나오는데도 몰랐다. 나는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었을까. 그때 내 모습은 자갈길을 달리던 수레가 바퀴를 잃고 주저앉은 모습이었다.

항암 치료 1년, 정기검진 2년이 다가와 안도할 무렵이었다. 재발이라는 말과 함께 골육종은 완치가 힘들다는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홀로 있는 시간에는 다가올 이별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 와중에도 아들은 중학교 과정 3년을 1등으로 졸업했다. 출석일은 못 채워도 시험점수만 충족되면 졸업시켜달라고 부탁드렸더니 허락해 주셨다.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했으면 했지만 아들은 학교를 원했다. 입학성적 1등으로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다. 500만원이라는 큰돈이었다.
재발한 항암치료는 포기하기로 했다. 병원을 오가며 치료하고 완치되어 사는 환우를 보지 못 했다. 항암약물에 망가져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주사바늘 꼽은 모습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들도 그걸 원했다. 면역 억제제를 맞지 않자 아이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암도 커졌던 모양이다. 다래꽃 수정 시키느라 정신없이 보내던 날 새벽, 아들은 열여섯 생을 마감했다. 나는 바람 빠져서 주저앉은 큰 고무풍선같이 늘 집안에 처져있는 날이 길어졌다. 목표물을 잊어버린 화살처럼 허공을 헤매다 맥없이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밝은 유월도, 뜨거운 칠팔월도 내게는 아무 느낌도 주지 못했다. 더 깊은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가을이 사람들을 바쁘게 한 듯 더 분주해졌다. 무서움이 엄습해왔다. 홀로 넓은 낯선 곳에 있는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집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친구도 생각났다. 스스로 삶을 내려놓고 간 친구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나는 아이가 아프기 전에 다니던 농업기술센터에 갔다. 유일하게 다니던 ‘생활개선회’로 농촌 여성들의 학습단체이다. 옷을 챙겨 입고 나선 세상은 나하고 대면하기 힘들어했다. 사람들은 무슨 위로가 적당한지 못 찾는 듯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암울에서 벗어나는 나의 노력은 일 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 계기로 ‘e-비즈니스 교육’과 ‘친환경 교육’을 받았다. 사람들과 접하면서 안정도 찾고 있었다. 교육은 내게 느슨해진 마음을 가다듬게 했다. 통신판매로 키위를 판매하면서 감정을 숨기는 방법도 터득한 듯했다.

처음에는 지인들한테 선물로도 보내고 하다 보니 첫해에는 많은 소득이 없었다. 내 삶의 이야기를 SNS에 쓰면서 판매가 점점 늘어갔고, 그분들이 소개해 준 덕분에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정신없이 달려 온 시간은 나를 지탱해 준 버팀목이기도 했다. 생소하게 시작된 고객 응대 방법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농약 키위를 알아주시는 분들이 늘었다. 큰 키위를 찾는 분들에게는 미리 설명했다. 무농약이 왜 좋은지와 열매를 크게 하는 비대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크기를 균일하게 담지 않았다. 농산물은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정확하게 같은 크기로 생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늘 힘들던 살림살이는 푼돈의 회전으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부자는 아니어도 좋았다. 내가 노력한 수고의 대가면 충분했다.

모든 생명체에는 자기 몸을 방어하는 면역물질이 있다고 한다. 해충이나 상처로부터 살아나기 위해 그 물질을 만들어 치유한다. 그런데 수시로 농약을 해대니 작물은 면역물질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사람도 감기 기운만 있으면 약을 먹어대니 스스로 이겨내려는 면역물질을 만들지 않는다. 봄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면역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야생에 있던 바이러스가 기생할 곳을 찾지 못해 인간을 선택했다지 않던가.

길가에 질경이는 밟혀도 강하게 견뎌낸다. 온실 안 양액 위에서 자란 채소처럼 부드럽고 예쁜 것을 선택할 것인지, 비바람 견뎌낸 투박하지만 건강한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소비자의 몫이다.

우리나라에서 무농약이나 유기농을 한다는 것은 수고에 합당한 소득을 기대하기 어렵다. 소비자는 무농약 농산물을 원하다가도 작은 점이 있다거나 못생긴 농산물을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사는 것은 꺼린다. 외관이 번듯하고, 맛도 있고, 가격도 낮은 완벽한 3종 세트를 원한다.

어렵게 농사지은 물건이라도 임자를 잘 만나야 제값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씹다 버리는 껌 한 통에도 가격표가 있는데 생명을 살리는 제일 소중한 먹거리에는 가격표가 없다.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로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 뉴스마다 농산물 때문에 물가가 오른다고 떠든다.

새로 조성한 키위밭에서 수확이 나려면 족히 3년을 기다려야 한다. 밭도 관리할 겸 간작으로 미니 밤호박를 심었다. 키위를 무농약으로 재배해야 하니 약을 할 수가 없다. 풀과 충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검정비닐을 깔고 그 위에 제초포를 덮었다. 비닐과 제초포, 고정핀 값만 600만원이 넘게 들었다. 설치하는데 8명이 꼬박 3일을 설치했다. 제초제 4병 2만원이면 끝날 일을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 했다.

우리는 교육을 다시 해야 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교육 과정에 먹을거리에 대한 모든 정보를 교육하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 줘야 한다. 그러면 건강한 삶을 이어가는 지혜로운 소비자층이 두꺼워질 것이고, 병원을 자주 찾지 않아도 되니 사회적 비용도 줄어들 것이다.

나는 쉰다섯 나이에 큰 꿈을 꾼다. 7000평에서 생산되는 키위를 다 직거래로 판매하는 꿈이다. 돈보다는 내가 해낼 수 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아이가 떠난 뒤 뿌연 안개에 갇혀 있는 것 같던 나의 삶은 키위를 키우면서 밝은 세상으로 걸어 나온 듯하다. 키위나무와 교감하며 하루도 같은 모습이 아닌 늘 새로운 모습을 대하며 힘을 얻고는 한다. 사람은 왜 태어나 왜 죽는가 하는 수많은 질문의 답을 찾은 듯도 하다. 삶, 그걸 알기 위해 왔고 알아가는 것이라고. 한 그루의 나무 같은 것이라고.

이제는 편안하다. 내 몸속에 있는 진주가 나와 하나가 된 듯하다. 아프고 아파서 눈물로 싸안다가 만들어진 영롱한 진주 한 알. 진주를 빛나게 하는 것은 긴 시련을 이겨내는 수많은 몸부림의 결과였다. 그래. 그 안에 그렇게 있자. 내가 너를 품고 있다고 느끼면서 그렇게 살아가련다. 훗날 다시 만나 얼싸안을 그날까지 엄마는 매 순간순간 열심히 살아낼 것이다.

이제 쉰다섯의 나이, 마지막 열정을 다하여 내 삶의 정상에 서 볼 생각이다. 그 정상이 어느 섬 조그마한 마을 뒷산만큼 나지막하더라도. 나는 농부의 아내가 아니라 농부다.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당당한 농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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