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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들의 자리, 무정무심하구나이진천 강원도신농정기획단 연구원

[한국농어민신문]

귀농 초기 처음 사귀어 든든했던
농업농촌의 대들보 40대 남성농민
2019년 8만여명으로 줄어 걱정 

정확히 나이 40에 춘천으로 귀농했다. 어설펐지만 친환경농산물 유통을 하면서 농민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사이 농사도 지었으나 지금까지도 농촌마을에 살지는 않는다. 그래도 귀농이냐고? 아무렴 농으로 돌아와 깃들어 있으니 귀농이다.

처음 사귀었던 농민들은 40대 형님들이었다. 친환경영농법인 작부회의에 초대받아 첫인사를 하고 술잔을 받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 그 자리 40대 초중반 농민이 10명이었다. 귀농자도 있었고 토박이도 있었다. 든든했고 감동이었다.

12년이 지나 다들 50대 중후반이 되었다. 여전히 남아서 농사짓는 사람이 5명, 그나마 친환경농사를 고수하는 사람은 1명이다. 5명은 농사를 작파하고 떠나 시내 등에 살면서 다른 일을 한다.

떠났다. 시골에서 아이 교육하기 힘들어서, 모시는 어르신들이 아프셔서, 가정이 평안치 못해서 떠났다. 강원도 여기저기 산에서 벌목 일을 하거나, 농업인단체 상근을 하거나, 목수 일을 하거나, 어딘가 있다는데 소식 끊겼거나.

떠나는 순간마다 이유는 구구절절. 그러나 40대 농민이 배우고 벌려놓은 농사를 때려치우는 까닭은 사회과학적으로 동일한 분석이 가능하다. 농사지어 현금을 만질 수 없고, 농사로는 전망이 안보여서다. 그 형들의 여건과 역량이 그러하였기에,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인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다행이다. 모두 어떻게든 살아있으니 말이다. 저 멀리서 농사짓다가 마음 아프게 떠난, 아는 40대 농민들의 슬픈 이야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쓰리다. 다쳐서 몇 해 버티며 괴로워하다 떠난 농민, 스스로든 병으로든 세상을 등진 농민. 별로 풀고 싶지 않은 사연들이다.

민중가객 정태춘의 88년 곡 ‘고향집 가세’를 좋아한다. 귀농강의를 할 때면 들려주기도 했는데, 노래에 담긴 처연한 느낌을 함께 느끼고 싶어서였다. 농촌마을의 쇠락은 수십 년 동안 떠나간 자들이 남긴 회한의 흔적 아니겠는가. 가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내 고향집 마당에 쑥불 피우고, 맷방석에 이웃들이 앉아. 도시로 떠난 사람들 얘기하며, 하늘의 별들을 볼게야. 처자들 새하얀 손톱마다 새빨간 봉숭아물을 들이고. 새마을모자로 모기 쫓으며 꼬박꼬박 졸기도 할게야. 에헤야 그 별빛도 그리워. 에헤야 어머니 계신 곳.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노래 속의 풍경을 상상해보자. 별이 보이는 맑은 여름날, 어느 시골집 너른 마당에 마을사람 몇몇이 모였다. 봉숭아물 들이는 처자도 있고, 모깃불에 새마을모자도 등장한다. 나른한 밤에 빈자리가 느껴지고, 누군가 그리워진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울로 돈 벌러 간 철수는 어찌 지내려나?” “저번에 직장이 문 닫아서 옮겼다던데?” “동수는 여전히 팔도를 돌면서 장사한다지?” “이번에 트럭 바꾼다는 소리도 있던데.” “어머님도 아프신데 잘 지내야 할 텐데 말이야.” “농사꾼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해?” “에이, 그래도 생각이 나니 그렇지.” “이번 추석에는 다들 얼굴 한번 볼 수 있으려나?” “김장거리 달라고 꼭 오니까.” “하긴, 맡겨놓은 것 마냥 오지.” “그게 어디야. 하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맞는 말이지만 난 자리가 유별나게 느껴질 경우만 그렇다. 노래는 80년대의 풍경이다. 지금 2020년은? 구멍이 숭숭 뚫린 곳에 구멍 하나 더 뚫린들 알아채지 못한다. 농민이 떠난 자리 또한 마찬가지다. 이제는 떠남도 빈자리도 유별나지 않은 것이다.

40대 남성농민은 농업농촌의 대들보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전체 농가인구가 27% 줄어드는 사이, 농가인구 중에서 40대 남성은 2010년 18만여명에서 2019년 8만여명으로 56%가 줄어들었다. 농업농촌의 대들보 40대 남성농민이 훨훨 떠났거나 쫓겨났거나, 더 이상 대들보로 세울 30대 농민이 없어서거나 결론은 같다. 농업농촌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은 말이다.

지난달, 어디 논을 지나면서 옛 기억에 잠겼다. 10년 전 친환경 로컬푸드 꾸러미를 한답시고, 사과에 소 몇 마리 키우던 형을 졸라서, 하우스에 20가지 이상 채소를 심었다. 그 번잡한 농사가 잘 될 턱은 없었으나 즐거웠다. 순박한 형도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농사가 죽기 살기로 집중해도 힘든데, 형은 이런저런 도움만 주다가 결국 뭐 하나 제대로 되지는 않았고, 2년여 만에 끝이 났다. 몇 년 후에 하우스는 다시 논으로 바뀌었고, 그 형은 마을을 떠났으며, 지금은 인삼밭이 될 예정이다.

차마 추억이라고 미화하지 못한다. 그런 일이 있었고 그런 떠남이 있었을 뿐이다. 이제 땅 주인은 바뀌었고, 마을은 귀농자 몇이 들어왔을 뿐이고 텅 비어 그 형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렇게 무정하고 이토록 무심하다.

코로나에 태풍에 이번 추석처럼 힘든 추석이 또 있겠는가. 추석을 앞두고 훈훈한 이야기나 하면 좋으련만, 힘든 만큼 사람을 떠올린다. 돈에 기대겠는가, 정책에 기대겠는가?

힘듦은 사람에게 기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농촌에 사람이 없다면 떠난 농민들이라도 소환할 밖에. 반짝이라도 좋았던 시절도 한 때는 있었으니, 추석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때일 것이다. 모두 평안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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