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해 열사 17주기 추모식

[한국농어민신문 고성진 기자]

‘고 이경해 열사 추모식’이 지난 9월 11일 전북 장수군 한국농업연수원 내 열사 묘역에서 거행됐다. 코로나19 방역 수칙에 따라 야외 추모식으로 진행하며 열사의 뜻과 정신을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장수군 묘역, 유가족 등 참여
농민이 대접받는 세상 만들기
농업 회생 위한 한걸음 다짐

2003년 9월 11일 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 현지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자결한 고 이경해 열사의 정신을 기리는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가 주최하고 한국농업경영인전북도연합회·장수군연합회가 주관한 ‘고 이경해 열사 17주기 추모식’이 9월 11일 전북 장수군 한국농업연수원 내 열사 묘역에서 열렸다.

이날 추모식은 ‘코로나19 재확산’ 국면에서 실시 중인 방역수칙에 따라 한농연중앙연합회와 전북도연합회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야외행사로 진행했다. 한농연중앙연합회는 전국 추모객들이 추모식 당일에 몰릴 가능성에 대비해 앞서 7일부터 11일까지를 ‘이경해 열사 추모기간’으로 정하고, 이 기간에 각 시도연합회가 자율적으로 참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추모식에는 이경해 열사의 유가족인 남동생 창준 씨와 딸 고운·지혜 씨 등과 함께 한농연중앙연합회 집행부, 시도연합회장, 장영수 장수군수, 김용문 장수군의회 의장, 이강환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장 등이 참석했다.

이경해 열사의 딸 고운 씨는 유가족을 대표해 인사말을 통해 “코로나19 사태로 농민 분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보도들을 접할 때마다 많이 힘들었다. 많이 힘드시죠?”라며 위로하고는, “이경해 열사가 ‘나는 작은 성냥골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한농연이 그런 단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 역할을 수행하는 그 길에 이경해 열사가 있고, 여러분이 있다”고 응원했다.

김제열 한농연중앙연합회 중앙회장 직무대행은 추모사에서 “열사님이 산화하신 지 어느덧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일생을 농민이 대접 받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했으나 고인께서 꿈꾸던 세상은 아직 멀기만 하다”면서 “감염병 확산과 기후변화로 인해 어느 때보다 농업의 중요성이 나날이 커지고 있음에도 정부와 정치권의 관심과 지원은 오히려 줄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탄식했다.

김제열 직무대행은 “그럼에도 우리 한농연 14만 회원은 농업을 포기할 수 없다. 녹록치 않은 현실이지만 막중한 책임과 역할을 가슴에 되새기고 우리 농업의 희생을 위해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며 “이번 17주기 추모식이 우리 농업의 전환점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농업경영인 출신 장영수 장수군수는 “장수군은 이경해 열사님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이경해 열사님 추모 영상 기록물을 새롭게 제작하고 있으며, 추모기념관을 설치·운영하겠다”면서 “우리나라 농업 발전을 위해 농업인을 위한 정책을 통해 돈 버는 농업·농촌으로 가꿔가는 것이 열사님의 뜻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추모했다.

김용문 장수군의회 의장은 “의장에 취임하고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일 먼저 묘소를 참배했다. 값진 희생정신을 기리며 국민과 함께 애도를 표한다”며 “열사가 그토록 사랑하시던 농업인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농촌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새로운 희망의 길을 열 수 있도록 우리가 다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열사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한농연의 자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성태근 한농연전북도연합회장은 “국내 최대 농민단체인 한농연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코로나 사태와 유례없는 태풍 피해 속에서도 어느 누가 농업의 어려움을 얘기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각성이 필요할 때”라며 “한농연이 열사의 뜻을 받들어 똘똘 뭉쳐 해 어려움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수=고성진 기자 kosj@agrinet.co.kr


●이경해 열사가 걸어온 길

이경해 열사는 1974년 서울 농업대학교(현 서울시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에 송아지 2마리와 함께 전북 장수에 서울농장을 세웠다. 1947년 8월 7일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고향 전남 영암을 떠나 5살 때 첫 발을 디뎠던 장수에 자신의 농장을 만들었다. 1978년 서울농장이 전북 새마을 청소년 훈련농장으로 지정되면서 훈련생 200여명을 배출, 1988년 제3회 FAO(유엔식량농업기구)로부터 아시아 태평양지역 ‘올해의 농부상’(농촌후계자 지도육성분야)을 수상하는 등 후계농 양성에 앞장섰다.

평탄하게 영농활동을 꾸려오던 중, 1980년대 초반 복지농촌시범사업 조성 정책 일환으로 수입소를 무리하게 농가에 분양하면서 농민들이 빚더미를 안게 된 ‘소파동’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농민들과 함께 같은 피해를 입었던 이경해 열사도 ‘농민운동’에 뛰어들게 됐다.

1983년 전국 최초 장수군농민후계자연합회장과 1987년 전북농어민후계자협회장을 거쳐 1989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의 전신인 한국농어민후계자협회 2대 회장을 역임했다. 1989년 협동조합의 민주화를 위한 ‘농·수·축협의 조합장 직접 선출에 관한 결의서’를 발표했고, 1990년에는 70일간 서명운동을 통해 ‘배합사료 부가영세율 적용’을 이끌어냈으며, 2001년엔 26일간 단식농성 끝에 체육청소년부로 탈법 이관된 한국마사회를 다시 농림부로 환원시켰다. 

이경해 열사는 1990년을 전후해 등장한 ‘신자유주의’에 극렬히 저항했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농산물 수입개방이 우리 농업을 위기로 내몰 것이라는 우려와 확신에서다. 그는 1990년 11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있던 스위스 제네바의 GATT 본부 앞에서 ‘WTO kills farmers’(WTO가 농민을 죽인다)를 외치며 할복을 시도했었고, 2003년 9월 11일 제5차 WTO 각료회의가 열렸던 멕시코 칸쿤에서 2m 50㎝의 저지장벽 위에서 ‘WTO kills farmers’(WTO가 농민을 죽인다)를 외치다 자결했다.

“나는 염려마라, 열심히 투쟁하라”를 마지막 유언으로, 이경해 열사는 이역만리인 멕시코 칸쿤 현지에서 농민들의 곁을 떠났다. “몸은 먼저가지만 정신은 남아 지켜볼 것이다. 나는 작은 성냥골이 될 것이다”라는 유서도 남겼다. 향년 56세였다.


●이경해 열사 약력

1974년 서울농장 설립(장수읍)
1982년 농업계학부출신 100명 영농후계자 선정
1987년 전북농어민후계자협의회 회장
1988년 FAO ‘올해의 농부상’ 수상
1989년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 회장
1990년 한국농어민신문 초대회장
1991년 전라북도 도의원
1992년 민주당 제14대 대통령선거대책 중앙위원
1995년 전라북도의회 산업위원장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농어촌특별위원회 부위원장
2000년 전북농민단체협의회 고문
2001년 스위스 제네바 WTO본부 앞 1인 단식농성
2003년 9월 11일 제5차 WTO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산화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