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범 여민동락공동체 대표

[한국농어민신문]

이렇게 격동의 세월 속 상상하기 어려운 가난과 폭력을 온 몸으로 겪으며 침묵과 절제로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빈곤율, 자살률 십수년째 부동의 1위,  생활기반시설이 거의 와해된 농촌의 현실은 오래된 익숙함이고 체념일 것이다.

80대 할머니 한 분이 아침 일찍 여민동락에 오셨다. 모처럼 면소재지에 일 보러 나왔는데 날짜를 헷갈린 것 같다고 확인 좀 해달라는 말씀이다. 맞다. 해당 기관에 전화 해보니 할머니가 잘못 아셨다.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런데 돌아 갈 일이 갑갑하다. 버스 올 시간은 멀었고 마땅히 쉴 곳도 없다. 이럴 때 여민동락은 그나마 비빌언덕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바빠도 할머니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여민동락의 중요한 책무다.

최근 몇 년간 위기에 처한 농촌의 구조적 문제에 천착하며 밖으로 돌다보니 정작 할머니들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매우 줄었다. “워메, 권 선생 오래간만이네. 뭐하고 지낸가!”부터 심지어 “권선생 이사 갔는가?”라는 농반진반 이야기에 머쓱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잘 됐다 싶었다. 갑작스러운 코로나19로 펼쳐진 답답한 일상을 할머니들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마을에 함께 갔다.

경로당은 또 다시 폐쇄되었기에 할머니들이 주로 모이는 시정으로 모셨는데 마침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고 인사드리고 보니 예전부터 특이한 나이 때문에 궁금했던 분이다. 시골에서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대개 부모님이 호적을 늦게 올려 실제 나이가 더 많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할머니의 경우 무려 10년이나 호적이 빨리 올라가 현재 주민등록상 100살, 그러니까 실제로는 90살이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으신걸까, 드디어 여쭤봤다. 이 할머니도 원래는 다른 분들처럼 2년 정도 늦게 올라갈 상황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어머님이 친정식구들과 일본으로 가면서 한국에서 호적을 올리지 못했고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호적을 올리다보니 서로의 착오로 1921년생이 되버렸단다. 일본에서 한국인들이 강제노역을 했던 탄광근처에 살았다는 이 할머니는 그 인연 때문인지 돌아와 얼마 안되어 어머니 손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셨고 일본 탄광에서 일했던 남자와 결혼을 하셨다. 두 살 무렵 일본에 가는 통에 한국말을 제대로 몰라 서러웠던 시집살이부터 마을에 일본말을 할 줄 알았던 나이차이 많이 나는 언니의 도움으로 한글을 깨우치고 어렵게 어렵게 농사 짓던 이야기, 여지없이 이 할머니도 남편 때문에 맘 고생, 몸 고생했던 고단한 삶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데 한편의 장편 영화를 보는 듯한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매번 비슷하지만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안타깝고, 슬프고, 미안하고, 고맙고 별의별 감정이 교차한다. 일제강점기, 6.25, 전후 보릿고개라는 징한 놈의 세상을 허리띠 졸라매며 악착같이 살았다는 할머니들에게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격동의 세월 속 상상하기 어려운 가난과 폭력을 온 몸으로 겪으며 침묵과 절제로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빈곤율, 자살률 십수년째 부동의 1위, 생활기반시설이 거의 와해된 농촌의 현실은 오래된 익숙함이고 체념일 것이다. 아니다 다를까 코로나19로 좀 불편하고 심심하긴 한데 뭐 그럭저럭 견딜만한 상황 정도로 말씀하신다. 오히려 자식들이 밥 잘 챙겨먹고 조심하라고 전화도 자주한다며 별 걱정을 다한다는 투다. 맞다. 또 배웠다.

우리는 할머니들에게 뭐가 필요한지, 어떤 도움을 드릴지 물어보지 않는다. 가진 것도 없지만 시혜의 대상정도로 여기는 그러한 질문은 진실된 답을 얻기도 어렵고 사실 어르신들의 존엄을 훼손하는 잘못된 방법이다. 어려운 취약계층을 돕는 정도의 복지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한 보편적 권리이자 천부적인 인권으로 확장된지 오래인 이 시기에 여전히 동정(同情)에 가두는 접근은 지양해야 할 과거의 유산이다. 아쉽지만 지금도 여기저기 펼쳐지는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국가복지 전달체계의 개선과 복지서비스 확대도 중요하고 가능하면 기초노령연금을 대폭 상향하여 좀 더 여유 있고 품위 있는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 그와 더불어 한글조차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지만 과거 자식과 남편 뒷바라지에, 국가의 요구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 할머니들이 얼마 남지 않은 생, 마을과 지역의 당당한 구성원이자 존중받는 원로로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이날도 할머니들이 맨날 이야기하는 “이렇게 좋아진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마지막 생을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겠는지 작당모의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마을에 계시는 총 10명의 할머니 중 7명이 시정으로 모였다. 말소리가 들려 나왔다며 이 할머니의 이야기에 맞장구도 치고 그동안 미처 듣지 못했던 이야기에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들었다. 무려 세 시간이지만 허투루 살지 않았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거기에 앉아 있던 모두가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른 일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일어나는 순간 할머니들이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 “내 이야기는 언제 들을건가!”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연신 인사드리고 돌아왔다. 오면서 여민동락 초창기 묘량면 736명 어르신들의 자서전을 만들어 경로당에 비치하고 자녀들에게 보내겠다는 호기가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번에는 꼭!

그나저나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나중에 과연 허투루 살지 않았음을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오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실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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