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강원도신농정기획단 연구원

[한국농어민신문]

사람중심의 농정 논증하는 것보다
청년농 관리·응원하는 일이 실익 커
지역농정 사활 걸고 민관협치 나서야

코로나19의 무차별 확산 추세에 3단계 거리두기를 검토 중이고, 멀리서는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글이 읽히게 될 며칠 뒤는 어떤 모습일지 가늠하기 어렵다. 무력함에 저절로 기도하게 되는 시절이다.

어느덧 논점이 바뀌고 있다. 이제 코로나가 종식된 다음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예견하지 않는다. 또 다른 변종 코로나가 출현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감염병과 고통스럽게 동거하는 팬데믹 세상을 이야기한다. 도무지 해피엔딩을 짐작할 수 없고 혹시나 파국으로 치달을까 두려워지는 장르라서, 코로나는 답답하고 두렵다.

그런데 해피엔딩이 짐작 안 되는 암울함에다가 이야기가 파국으로 치달을까 두려운 장르는 가까이에 있다. 바로 농업농촌이라는 장르다. 코로나에 빗대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지만, 기본적인 패턴에서 충분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초국적 시장과 자본에 속박당한 농민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유통과 소비라는 자본에 투항한 생산으로써의 농업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고, 투기와 욕망에 너덜거리는 농지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며, 도시의 배후지로 전락한 늙고 쇠락한 농촌을 이야기해볼 수도 있다.

이런 어두운 이야기들의 플롯에는 해피엔딩을 상정할 방법이 없다. 이야기가 더 나아갈수록 파국이 다가올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너무도 불편한 이야기들이다. 애석하게도 그 중에는 청년농 이야기도 있다.

청년농 이야기에 새드엔딩과 파국을 연결시키는 것은 얼핏 보면 부조화로 보인다. ‘청년농은 희망이고 미래 그 자체가 아닌가? 농업농촌이라는 성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같은 존재들 아닌가?’ 아니다. 이런 식의 무성한 말의 잔치는 무책임한 수사일 뿐이다.

어떻게, 전체적으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장르 속에서 대체 어떻게, 이제 갓 농업농촌에 발을 들인 청년농만 독야청청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정한 시장이 비정한 자본이 청년농에게 각별히 다정할 이유가 있는가? 농지를 제대로 물려주었는가? 청년농 부부가 아이 키우며 살만하게 농촌이 지탱되고 있는가? 결정적으로 우리는 청년농을 믿고 끝까지 뒷받침해주고 있는가?

어떻게든 막힌 물꼬를 터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 최근 강원도신농정거버넌스와 기획단은 정책과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핵심은 ‘청년농 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며, 이에 따른 ‘청년농 정책의 집중’을 제안했다. 전환과 집중은 다 연결되어 있다.

어디서든 농정 패러다임의 전환을 논할 때는, 생산성·생산물·생산력중심에서 ‘사람중심의 농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매우 모호하다. 그러나 사람중심의 농정은 청년농정책에서 명확히 드러날 수 있다.

숫자를 보자. 농업경영체 등록현황 기준으로 45세 미만 청년농은 2015년도에 9만명이었으나 2019년도 8만4399명이다. 전체 농업경영체 대비 비중은 5%. 강원도 4.2% 전라북도 6.3% 사이를 오간다. 이 숫자들은 농업경영체 등록 통계일 뿐이다. 관리되어 파일에 담겨있는 숫자가 아니다.

다른 숫자를 보자. 2020년 1월 중앙방역대책본부가 코로나 검사를 시작한 이래로 8월말 현재 180만여명이 검사를 했다. 누적 확진자 1만7665명 완치 1만4219명 안타까운 사망자 309명. 다행히도 양성 확진률은 1%다. 이 숫자들은 결과적인 통계다. 관리되어 파일에 담겨있는 숫자다.

사람 중심의 농정이란 것을 잘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는 설명할 수 있다. “국가가 긴급한 방역대책으로 7개월 동안 180만명을 파일링 했습니다. 공개되지 않았을 뿐, 확산을 막고자 신상정보와 동선을 DB로 만들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긴급한 농정대책으로 청년농 8만여명의 DB는 있습니까? 청년농의 농사와 삶의 여러 모습, 청년농의 성공과 좌절은 확인되고 관리되고 있습니까?”

처음부터 잘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긴급하면 수백만명도 검사하고 관리할 수 능력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걸 잘해서 모범 방역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마찬가지로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유입되지 않는 청년농 수만명도 관리할 수 있는 행정과 민간의 능력은 분명히 있다.

중앙정부가 다 할 필요도 없다. 이런 정책이야 말로 지방자치에 어울리는 정책이다. 예컨대 강원도나 충청북도나 45세 미만 청년농은 4500명 수준인데, 광역 지자체가 4000여명을 일상적으로 관리하고 있는가? 어디가 더 세밀하게 관리하는지 강원과 충북이 진정한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 어떻겠는가?

청년농을 유형별로 접근해야한다느니, 승계농에 투자해야 한다느니, 반농반X가 유행이라느니, 그 어떤 주장도 공허할 뿐이다. 기초부터 부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되지도 않는 청년농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피는 일은 전문성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담조직을 통한 집중이 필요하다. 지역농정의 사활을 걸고 민관 협치로 함께 가동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안 하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농정의 기초는 사람이다. 해피엔딩을 기약할 수 있는 농업농촌을 물려주는 실마리는 사람이다. 사람중심의 농정이 어떤 농정인지 논증하기 보다는, 당장 청년농 하나를 관리하고 돌보고 응원하는 일에 훨씬 큰 실익이 있다. 기성세대의 의무이자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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