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농어민신문]

농촌에서 경관은 마을주민 공동 문제
대부분 시골 사람이 직접 노동해 가꿔
오랜 성숙·조화 거친 ‘지역사회의 얼굴’ 

폭우 때문에 망가진 수리시설, 주택, 농경지, 비닐하우스 등등을 복구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보게 되리라. 머지않아 찾아올 가을의 청명한 햇살 아래 ‘원래의 모습이면서도 다시 고쳐 새로운 경관들’이 드러날 것이다. 농촌 지역사회의 회복력(resilience)을 실감하게 되리라.

농촌의 경관은, 깨끗하든 지저분하든, 아름답든 보기 싫든, 마을 사람들 삶의 무늬이다. 무늬라고 하면 겉치장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가령, 수십 년 동안 아껴 쓰고 고쳐 쓴 살림살이 가구에는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오랜 시간의 무늬가 남는다. 기분에 따라, 그리고 돈만 있으면 쉽게 바꿀 수 있는 요즘의 가전제품 따위와는 다른 것이다. 그렇게 무늬는 속에 쌓인 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닳고, 깨지고, 해지고, 부러진 것을 그때마다 다시 손질하고 고쳐 놓는 강인한 회복력의 징표다.

사람의 겉모습에는 인생역정이 드러난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수십 년 논밭에서 일하며 살아온 할머니의 주름투성이 거친 손을 보면 고단하고 부지런했을 그 삶을 짐작하게 된다. 농촌의 경관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우선, 농촌에서 경관을 누가 만드는지를 생각해보자. 도시의 경관은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서 결정되는 게 많다. 도심에서는 건물 높이가 얼마 이하여야 하고, 몇 층 이상의 건물 앞에는 반드시 조형예술 작품을 설치해야 하며, 아파트 단지에는 그 규모에 따라 녹지가 얼마나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건물주가 법을 지키는 것으로 경관 형성과 관련된 책임을 다하게 된다. 그래서 도시민들에게 경관 문제는 남의 일이기 쉽다.

그런데 농촌 주민에게 경관은 처음부터 자신의 일상생활에 직결된 문제이기 쉽다. 마을 뒷편 소나무 언덕을 밀고 수천 평 태양광 시설이 들어선다고 할 때, 내 땅이 아닌데도 주민들이 반대하는 이유 중에 중요한 것이 ‘경관 훼손’이다. 프랑스나 독일 같은 서유럽 국가들의 농촌에서 지붕들 색깔이 똑같고 건축 스타일이 일정해서 깔끔하고 예뻐 보이는 건, 마을 사람들이 경관에 관한 규칙을 합의하고 지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농촌에서 경관은 마을 주민 공동의 문제다. 경관이 잘 다듬어진 마을을 지나노라면, 그 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합심(合心)해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도시 경관을 구성하는 소재는 대개 콘크리트, 아스팔트, 철강 따위다. 어쩌다가 잔디가 깔린 공원을 만나도, ‘자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농촌 경관은 인간의 활동이 낳은 것이지만 자연과도 어울린다. ‘다양한 감각 경험’을 제공한다.

사과꽃 활짝 피고 햇살 맑은 4월의 봄날, 충남 예산군의 어느 과수원 동네 마을길, 내가 아끼는 풍경 중 하나다. 차 한 대 지날 만큼 좁은 길 양쪽으로 오래된 사과나무들이 서 있다. 하얀 눈송이 내려 앉은 듯한 풍경에 향긋한 꽃 내음을, 딱 그 시기에 바로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다. 그것과 비슷하게, 길가에 소금별 뿌려놓은 듯 피어난 찔레꽃 향기도 도시에는 없는 경관이다. 이 글을 쓰는 밤 늦은 시간, 창문 열어놓은 틈으로 자동차 소리에 섞여 멀리서 개구리 울음 소리 들린다. 이처럼 농촌의 경관은 눈으로만 느끼는 게 아니다.

농촌 마을 경관의 대부분은 시골 사람들이 직접 노동하여 가꾼 것이다. 어떤 장소를 만드는 데 땀흘리고 공들인 만큼 정(情)이 들게 마련이다. 여럿이 의견을 나누며 지속적으로 가꾼 장소는 더욱 그렇다. 돈 문제가 아닌 것이다. 농촌 마을의 경관을 가꾸는 일이, 건축업자에게 돈을 주어 건물을 새로 짓고 조경수 몇 그루 옮겨 심는 사업으로 끝날 수는 없는 까닭이다.

하다못해 마을 진입로 곁에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를 제거하는 일에서도 그런 이치가 드러난다. 마을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하루 일당을 주고 부탁하는 것과 마을 사람 여럿이 예초기를 손에 쥐고 함께 풀을 깎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난다. 앞의 경우는 ‘제초 서비스를 구매한 것’에 불과하지만, 뒤의 경우는 ‘마을 경관을 가꾸는 일에 사람들이 협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고로운 일이다. 그러나 농민이라면 다들 알고 있듯이, 수고 없이 얻은 어떤 것이 보람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농촌에 사는 이들이 도시민보다 운이 좋다. 스스로 마을 경관을 가꾸는 일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건물 앞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어도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고, 자투리 땅이 있다고 해서 주민 마음대로 꽃밭을 만들 수도 없다. 내가 사는 장소의 경관을 이웃과 함께 가꾸는 경험은 이제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귀한 일이 되었다.

어떤 장소의 경관을 직접 가꾸는 경험은 어린이나 청소년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요즘에는 아이들이 제 방을 청소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옛 사람들이 청소하는 일을 도(道)라고 여겨, 사찰이나 서원에서 젊은이들에게 청소를 버릇들이게 했던 지혜를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 그런 면에서, 스스로의 노동으로 경관을 가꿀 기회가 주어지는 농촌은 오래된 지혜를 몸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다.

농촌 경관은 그냥 생겨나는 게 아니다. 그저 볼거리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마을 사람들의 의논과 수고가 땅에 스며들어 형성되는 문화경관이다. 자연경관에 곁붙어서 눈, 귀, 코의 여러 감각으로 느끼는 경관이다. 자연과 시간과 인간이 어울려 오랜 기간 성숙하여 조화로운 무늬로 형성되는 인문(人紋)의 경관이다. 그래서 농촌 마을의 경관은 그 동네 사람들 삶의 무늬이며 지역사회의 얼굴이라 하겠다. 소중하게 가꾸지 않을 수 없다.

우선은, 무너진 것부터 다시 일으켜 세우는 ‘회복’의 고된 시간을 거쳐야 하겠지만, 나중의 경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회복이든 경관 형성이든 사람이 있어야 되는 일인데, 사람살이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농촌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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